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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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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⑧
  • 이현정기자
  • 승인 2015.10.08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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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 추진과정

① 우리나라 서양치의학의 시작
② 쉐플리의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선교치과의사 부임까지
③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④ 부츠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센터 건립
⑤ 이유경, 정보라의 유학과 맥안리스 과장
⑥ 해방과 전쟁, 격동기의 세브란스 병원 치과
⑦ 연세 통합과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⑧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 추진과정
⑨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시작과 현재
⑩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현재와 미래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은 1967년에 문교부의 설립 인가를 받고, 치의예과를 개설한 후 1968년에 개교하였다. 1915년에 개설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과 세브란스병원 치과에서 시작하여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을 설립하기까지 53년의 설립 추진 과정은 한국 근대 치과의료의 성립과 현대 치의학 도입의 역사이다. 또한 제중원(1885)과 조선기독대학(1915)의 설립과 함께 통합이 추진되었던 기독교 종합대학교인 연세대학교(1957)의 역사이다.

1. 반세기의 꿈, 반세기의 노력
100년 전인 1915년에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대학’이 창립하고, ‘세브란스 연합 의학교’에 치과학교실이 개설되었다. 이 시기에 선교사들의 꿈은 기독교 각 교단이 연합하여 종합대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연합재단법인에 의해 연희전문학교(1917)가 출범할 때, 언더우드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학교, 신학교 등을 포함하는 종합대학의 설립이었다. 이러한 언더우드의 꿈은 에비슨과 원한경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국 최초의 ‘치과의학교’ 설립의 비전은 일제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에비슨의 치과의학교 설립 목표는 치과의료 선교사 쉐플리, 부츠, 맥안리스에 의해 체계적인 환자 진료, 치의학 교육, 연구, 치과의사 수련, 교원 양성, 치과건물 신축, 최신 장비 도입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후 이유경, 박용덕은 세브란스 병원 치과를 최고 수준의 치과병원으로 발전시켰다. 이동섭은 본격적으로 치과대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지헌택은 설립 인가를 받았다. 에비슨의 정신을 계승한 역대 치과과장들의 일관성 있는 노력과 윤중호 등 교실원 출신의 헌신으로 반세기 만에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2. 연세 통합과 치과대학 설립 추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통합(1957)으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치과학 교실의 책임을 맡게 된 이동섭과 치과의료 선교사 메키너스는 1월부터 치과대학 설립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동섭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하나만으로는 우리나라의 치의학 발전이 더딜 것이며, 특히 학문의 분야에서는 선의의 경쟁이 꼭 필요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치과대학 신설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메키너스는 이동섭의 계획에 동감하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시 대한치과의사회(현 대한치과의사협회)는 치과대학의 교육연한을 4년제에서 6년제로 연장하는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의(1955)한 상태였다. 이후 치과의학교육 연한 개정령이 공포(1959)되면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치의예과가 설치되었다.

3.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 건의서

치과대학 설립 구상을 담고 있는 첫 번째 공식 문서인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창설에 관한 보고서(Dr. John Mc Innes)’는 1957년 2월 28일에 보고되었다. 메키너스는 이 보고서에서 미국 치과의사협회 교육위원회로부터 입수한 자료와 한국의 상황을 비교하여 치과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1957년 12월에 한국을 떠나 이듬해인 1958년에 미국치과의사협회지에 ‘한국의 치과의료에 대한 논평’라는 제목으로 기고하였다. 이 글에서 한국인의 구강건강 상태와 치과의료 문제를 지적하고 두 번째 치과대학의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치과대학의 구체적인 설립 계획을 이해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문서는 1963년에 작성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을 위한 건의서’이다. 이 문건은 총 34쪽의 등사본으로서 치과대학 설립 목적부터 기구 계획표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설립 5개년 계획을 기술하고 있다. 안종서 대한치과의사협회장의 건의서가 포함되어 있다.

서언은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현재 한국의 치과 교육기관으로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뿐으로, 이 대학은 매년 일백 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으며 총수 일천오백 명밖에 되지 않는 치과의사로서는 팽창하는 인구에 비해 기수가 극히 부족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에 비추어 연세대학교에 치과대학을 창설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논의되어온 사실이지만 이번에 구체적으로 치과대학 설립안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 계획을 위하여 협조적인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려니와 우리로서는 감히 대한치과의사협회와 보건사회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획득하였으며 더욱이 미국 아리조나주에 있는 메키너스 씨가 주도하는 치과대학 설립 기금 모집운동을 비롯하여 주한 미군민사협의처 및 미군의 경제적 후원 등은 대단히 희망적인 것입니다”

 

4. 치과대학 설립 신청과 설립 인가
이동섭은 전문과목별 교수 충원, 수련의 제도의 확립, 설립 계획 수립 등 치과대학 설립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와 함께 본격적으로 설립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세브란스 연합 의학교 치과학교실 첫 번째 수련의였던 안종서(1925년 입국)는 대한치과의사협회장 자격으로 백낙준 총장을 찾아가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을 정식으로 건의했다.

연세대의 치과대학 설립 계획이 알려지자 치과계의 설립 반대가 표면화되었다. 이미 전남대학교와 경북대학교가 치과의학부 학생을 모집(1955) 하였다가 치과계와 대한치과의사회(대한치과의사협회)의 반대로 1957년에 치의학부가 폐지되었던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이동섭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김동순 학장을 찾아가 “치의학의 발전을 위해 서울치대의 모집 정원을 조금 줄이고서라도 연세치대를 설립해야 한다”며 설득하였다. 많은 치과계 지도자들에게 설립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마침내 대한치과의사회의 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동섭의 후임으로 지헌택은 치과과장으로서 설립 신청과 인가 과정을 주관하였다. 재단 이사회의 승인을 받은 후 1965년 10월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 허가 요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1968년 12월 4일 문교부는 마침내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치과의료 선교사 쉐플리가 1915년 11월 1일에 부임하여 치의학 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한지 53년 만에 이룬 결실이었다.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은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통합 이후 신설된 최초의 단과대학으로 ‘연세’ 통합 정신을 구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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