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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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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②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5.08.27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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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플리의 세브란스 선교치과의사 부임

1.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다.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가 선교치과의사로 한국에 온 동기는 가족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1848년 독일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 1세대였다. 뉴욕항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미국 땅에 입 맞추며 충성을 맹세’했다. 쉐플리 일가는 펜실베니아주의 레딩에 정착해 노동자로 일했다. 정치적으론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주의자였다.

남북전쟁(1861~1865)에 참전한 증조할아버지는 왼쪽 다리를 잃고 사망했다. 친할아버지 역시 “오른쪽 다리와 전우 40명을 잃었지만 맘 속 평화를 느끼며 살아남아”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덕분에 아버지 제이콥은 우체국 직원인 제인과 결혼 후, 35살 때 연합복음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 부부 사이에서 1892년에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가 태어났다. 두 누나 모두 11세에 결혼했고, 매형 한 명도 목사가 되었다. 쉐플리는 기독교 신앙 속에 행복을 느끼며 성장했다. 성가단원으로 시작하여 180cm 키의 매력적인 테너가수로, 지휘자로 성장했다. 주일학교 학생에서 교사훈련자가 되었다.

필라델피아 중앙고등학교(1906~1910) 시절, ‘학생자원운동’과 ‘면려청년회’에 참석했다. 미국의 학생자원운동은 1888년부터 1945년까지 매일 한 명꼴로, 선교사를 무려 2만500명이나 해외로 파송하였다.

“고 2때부터 해외선교사로 활동하는 남녀들과 접촉하면서 해외선교에 대한 소망을 키우던” 쉐플리는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2. 필라델피아 치과대학 졸업과 치과의료선교 지원


1863년 개교한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은 1907년 12월 템플대학과 병합하였다. 1880년대 이후 치과학교 간판을 내걸고 졸업증을 남발하는 사설학교들이 급증하자, 1909년경 미국치과의사협회(ADA) 미국치과교육위원회와 교수위원회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3~4년간의 치의학 정규 교과과정과 종합대학 병합 등의 인증기준을 마련하고 규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0년대 미국은 2000년대처럼 양극화현상이 심화되던 때였다. 국민소득 중 상위 10%의 몫이 45~50%를 차지했고, 값싼 이민노동자들은 노조를, 시민들은 대중문화와 민주당을 지지했다. 치과대학생 쉐플리는 ‘금주위원회 의장, 면려청년회의 회장’을 맡았다. 3학년 졸업반 때 ‘중국사람들이 치과의사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합복음교회 선교치과의사를 자원하였다. 하지만 치과선교를 지원하려는 선교회가 없었다. 쉐플리가 졸업하던 1913년 6월까지 학교는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쉐플리는 최우수학생으로 졸업하였다. 또 임상이나 교육, 연구 측면에서 장래가 가장 유망한 치과의사라는 교수평을 들었다.

쉐플리는 치과의료선교를 못한다면 장차 교수가 될 생각으로 해리스버그에 개원(1913. 12~1915)을 했다. 개원한지 2주 만에 ‘장로회 선교본부가 중국에 파송할 치과의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쉐플리는 장로회에 편지를 썼다.

“현재 나는 약 1200 달러 상당의 치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교육과 장비 구입으로 약 1200 달러의 부채가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개업이 성공적이지만, 만일 선교치과의사의 길을 열어주신다면 기꺼이 헌신하겠습니다”(1913년 12월 23일자).

하지만 장로교에서는 중국지부 치과의사 파송요청을 취소했고, 마침 서울 세브란스병원의 에비슨이 치과의사를 찾고 있어 연결해 보았지만 쉐플리의 부채와 어린 나이 때문에 유감스럽다고 답했다.

쉐플리는 포기하지 않고, 1914년 9월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정식 지원서와 6명의 추천서, 건강진단서를 보냈다. 의사 2인, 치대 교수, 목사, 동료가 보낸 추천서에는 ‘쉐플리의 성격이 견실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고, 추진력과 독창성, 협동력, 수행능력, 지도력이 있다’, ‘업무에 철저하고 현명하고, 돈을 알뜰하게 사용한다’,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며,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평가돼 있다. 건강진단서에는 쉐플리는 몸무게 67kg로 양호하며, 갈색 눈에 안경을 썼으며, 천연두와 장티푸스 등의 예방접종을 받아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세브란스 병원장 에비슨과의 만남

1914년 12월 안식년을 맞은 에비슨 부부는 쉐플리의 치과와 약혼녀 루스 래플리 가정을 방문했다. 에비슨은 “쉐플리가 우리 학교직책을 충분히 잘할 적임자이며, 약혼녀 래플리는 유치원 교사로서 유망하다”고 호감을 표현했다.

쉐플리는 “현재 미국에서의 경제적인 전망이 밝지만, 봉사할 수 있는 서울로 가고 싶습니다. 나는 나이에 비해 진정 사려가 깊습니다”라며 세브란스의학교에 가게 된다면 결혼식을 마친 후 개업을 정리하고, 장로교로 교파를 옮길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에비슨은 쉐플리의 치과진료장비를 인수할 것이며, 쉐플리의 월급은 존 세브란스와 알렌 부인이 지원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냈다.

1915년 2월 15일자로 쉐플리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치과교수로, 래플리와 함께 한국선교회로 임명받았다. 4월 쉐플리는 충수돌기염 수술을 받았다. 쉐플리와 래플리는 함께 예방접종을 받고 여권도 발급 받고, 이른 여름 결혼식을 치렀다. 두 사람은 8월 7일 증기선 톤요 마루(Tonyo Maru)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하여 31일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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