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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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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⑥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5.09.24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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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전쟁, 격동기의 세브란스 병원 치과

① 우리나라 서양치의학의 시작
② 쉐플리의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선교치과의사 부임까지
③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④ 부츠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센터 건립
⑤ 이유경, 정보라의 유학과 맥안리스 과장
⑥ 해방과 전쟁, 격동기의 세브란스 병원 치과
⑦ 연세 통합과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⑧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 추진과정
⑨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시작과 현재
⑩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현재와 미래

1. 해방 공간의 치과의료
갑자기 찾아온 해방은 치과의료계에도 혼란과 격변의 시대를 예고하였다. 유일한 치의학 교육기관인 경성치과전문학교는 부실한 시설과 장비를 남긴 채 일본인 교수들이 떠났다.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운영하던 치과의원들이 적산으로 접수되었다. 해방 당시 등록된 남한의 치과의사는 257명으로, 이후 560명(1947), 733명(1948), 702명(1949)로 증가하였다. 경성치과전문학교 출신의 치과의사, 검정 출신 치과의사, 한지 치과의사, 입치사 등이 혼재하던 시기였다.

미군정은 한국의 구강보건행정 및 치과의료 체계와 치의학교육 제도를 미국식으로 변화시켜 갔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훈련을 받고, 미국 유학 경력이 있는 안종서, 정보라, 이유경 등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출신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경성치과전문학교는 남아 있는 일부 한국인 교수들과 이유경(1928년 입국), 정보라(1932년 입국), 박유신(1934년 입국), 김정규(1942년 입국), 이영옥(1942년 입국) 등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출신들로 새롭게 교수진을 구성하였다.

미군정기에 구강보건 행정 기구로 보건후생부 치무국이 생겼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치무계로 축소되었고, 경성 치과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 조선치과의사회(대한치과의사협회, 1946), 조선치과의학회(대한치의학회, 1947)가 설립되었고, 조선치계(1947)가 창간되었다. 이 시기에 의·치 일원화 운동과 구강과 명칭 개정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정부와 의료계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의치 일원화 운동은 의사와 치과의사로 이원화되어 있는 제도를 일원화하여 치과를 의과의 전문과목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치과의사의 진료영역을 넓히고,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구강과 명칭 개정 역시 치과의 명칭을 구강과로 개정하여 진료 영역을 확대하고 치과의사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2. 세브란스 의과대학 치과학교실
해방이 되면서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아사히 의학 전문학교’로 개명되었던 교명을 되찾았다. 이듬해에 의예과를 신설하였고, 1947년 7월에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해방 당시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치과학교실에는 교수에 박용덕(1934년 입국), 조교수 박유신, 강사 김정규, 조수 이동섭(1943년 입국), 부수 노성윤(1945년 입국), 박응기(1945년 입국)가 근무하고 있었다. 이후 몇 명의 교수진이 경성치과전문학교를 자리를 옮긴 후에 세브란스 병원 치과는 박용덕 교수와 이동섭 강사가 교직원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박용덕은 1944년부터 1956년까지 치과과장을 맡았다

세브란스 병원 치과의 수련의 교육은 ‘예방의학과 보철, 보존, 교정, 구강외과를 세계 수준에 맞게 섭렵한 치과의사’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세브란스 병원 치과의 수련과정은 ‘서울치대를 졸업한 치과의사들이 우수한 임상의사로 성장하기 위해 꼭 거쳐 가야 할 선망의 대상’이었다. 교실원으로 입국하면 현재의 인턴 과정에 준하여 교수와 선배 교실원의 진료를 한 달씩 돌아가며 견학하고, 단계적으로 임상기술을 습득하는 체계적인 수련 과정이 확립되어 있었다. 이는 ‘치과의학교’ 설립을 목표로 개설된 치과학교실의 창립 정신과 오랜 전통의 산물이었다.

 

3. 한국전쟁 시기의 세브란스 병원 치과
한국전쟁(1950.6.25.)의 발발은 세브란스 의과대학 치과학교실과 세브란스 병원 치과의 역사에서 가장 큰 시련이 되었다. 1·4 후퇴 전까지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는 이동섭과 지헌택만 남아 있었고, 다른 교실원들은 군의관으로 입대하거나 사직한 상태였다.

세브란스 병원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치과에 남아있던 이동섭과 지헌택은 가능한 모든 치과 장비를 차에 싣고, 남는 장비는 부품을 빼서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이동섭은 이 치과 장비들을 가지고 거제도 장승포로 이동하였다. 초등학교 건물을 인수받아 세브란스 구호병원의 부속과로서 치과를 운영하며 진료를 했다.

이 시기에 거제도의 인구는 원주민 10만 명, 함흥, 흥남 철수 작전으로 실려온 피난민 15만명, 포로수용소에 갇힌 포로 10만 명으로 급증하고 있었다. 피난민은 모두 무료로 치료를 해주었는데 필요한 약품과 의료 소모품은 미8군에서 지원해주었으며 병원 직원들의 생활비와 병원 운영에 필요한 다른 비용들은 선교부에서 지원을 받았다.

4. 전후 복구 시기의 세브란스 병원 치과
정전협정(1953.7.27.)이 체결되면서 3년 동안의 긴 전쟁이 끝났다. 한국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였다. 접전 지역의 치과의원들은 전부 파괴되었고, 수원, 인천 지역의 치과의원도 50%의 이재율을 보였다. 남한의 치과의사 피해 상황은 서울 개업의 214명 중 이재율이 80%이며, 실종·사망자는 100명 정도 되었다.

이 해 8월에 세브란스 병원 치과는 서울로 돌아왔다. 다행히 치과 건물은 파괴되지 않았으나, 치과 장비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동섭이 피난을 가면서 어렵게 싣고 간 장비로 진료를 재개할 수 있었다. 이동섭과 지헌택은 다시 진료를 시작하였다. 박용덕은 이 해 9월에 서울로 돌아 왔다.

5. 세브란스병원 치과와 한국의 치과의료계
세브란스병원 치과 출신들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치과의료계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5명의 교실원 출신이 1945년부터 1986년까지 8대에 걸쳐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안종서는 해방 이후 결성된 대한치과의사협회(조선치과의사회)의 초대 회장을 맡은 이후 4회에 걸쳐 회장직을 수행하였다(1945~1046, 1950~1954, 1958~1960, 1962~1963). 이후 이유경(1964-1968), 김귀선(1972-1974), 지헌택(1978-1982), 이영옥(1984-1986)이 협회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또한 대한치과위생사협회(김숙향), 대한치과기공사협회(유성준)의 초대 회장을 배출하게 된다.

미군정기에 보건후생부의 보건후생국에 치무과가 설치(1945.10.27)되자 세브란스연합전문학교 치과학교실에 근무하면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유경과 정보라가 한국인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치무과는 나중에 치무국(1946.3.29)으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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