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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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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③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5.09.30 1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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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연재순서>

① 우리나라 서양치의학의 시작
② 쉐플리의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선교치과의사 부임까지
③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④ 부츠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센터 건립
⑤ 이유경, 정보라의 유학과 맥안리스 과장
⑥ 해방과 전쟁, 격동기의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⑦ 연세 통합과 세브란스 병원 치과
⑧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 추진 과정
⑨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시작과 현재
⑩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현재와 미래

 

1.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의 탄생
쉐플리 부부는 한 발 앞에서 종이테이프를 끊었다. 1915년 11월 1일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교실과 치과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개설된 치과학교실이었고, 종합병원급에서는 최초로 독립적으로 운영된 치과진료실이었다. 동양에서 해외선교운동과 연결된 치과가 생긴 것도 처음이었다.
 
초대 과장 쉐플리는 ‘구강진료와 교육,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쉐플리는 치과학교실을 통해 미국의 치의학문과 진료기술을 소개하고, 세브란스연합의학교 학생들에게 치과학을 강의하였다. 또 치과의사 수련 및 연구를 통해 치의학의 학문적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비교해 조선총독부의원의 치과는 외과 산하로 부설(1911. 3) 되었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가 조교수로 치과학 강의를 시작했지만 ‘치과학교실’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못했다. 쉐플리는 일본인 치과의사나 입치사들의 도제식 훈련과는 차별화된 미국의 ‘과학적 치의학’을 한국에 도입하고자 했다. ‘과학적 치의학’이란 일반의학교육을 강화해 치과진료의 범위와 질을 높이고 공중구강보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2. 치의학 교육과 총독부의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 억제
쉐플리는 한국인들이 치과에서 진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로 가난과 구강건강에 대한 인식 부족, ‘치과를 금박을 하는 금세공소로 생각하는 점’을 들었다. 당시 ‘일본인 치과의사나 입치사들은 양심과 도의를 망각하고 한국인들에게 충치가 없어도 마구 금관을 해 씌웠기 때문’이다. 쉐플리는 이러한 관행을 치과의료윤리 측면에서 비판하고,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치의학교를 다니거나 치과의사 자격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총독부는 1913년 ‘조선치과의사규칙’과 ‘입치영업자 취체규칙’을 공포해 일본인 치과의사와 입치업자의 신분을 보장했다. 하지만 10년가량 세부 규칙에 해당하는 조선 내 ‘치의학교 설립’이나 ‘치과의사시험을 실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치과학 강의도 경성의학전문학교와 마찬가지로 의대생에 국한해서 하도록 지시했다. 즉 총독부는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을 억제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쉐플리의 의대생 치과학 강의는 4학년생들에게 매주 1시간씩 진행되었다. 치과치료는 치과의사가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일반의사들은 치과질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대중상담과 간단한 발치, 소독에 임할 수 있도록 강의와 실습이 진행되었다. 쉐플리는 2년간 한국말을 배워 강의했으나 총독부에서는 일본책과 일본어로 강의하도록 독촉해 차질을 빚었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서는 1914년부터 인턴 수련제도를 실시했다. 쉐플리는 의대졸업생 중에서 ‘치과수련의’를 뽑았다. 2년간 치과이론과 임상, 기공을 수련시켜 ‘치과의사시험’을 치르도록 계획했다.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최주현, 유칠석, 일본인 치과의사 조수로 있던 한국인 한명이 수련의로 들어왔다. 그러나 최주현이 2년간 수련을 마쳤을 때, 총독부는 ‘동경치과대학실습과정’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험을 불허’했다. 최주현은 군산에서 일반의로 개업하고, 후배들을 치과수련을 포기했다. 하지만 쉐플리는 선교본부에 치과의사와 교수 몇 명을 더 보강하도록 요청하고, 관계당국과 협의해 치과학교나 수련기관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3. 쉐플리 과장 시기의 진료와 연구
쉐플리는 미국 치과대학 부속진료소를 모델로 한 치과진료실을 정비하였다. 방사선 촬영(1916)을 하고, 전기엔진이 달린 4대의 철재치과유닛췌어를 갖췄다. 기공은 기공사 2명에게 맡겼다. 총독부 치과가 4개의 목재치과유닛췌어와 족탑엔진으로 시작(1914)한 것보다 기자재면에서 우수했다.

시술범위는 간단한 보존과 발치에서 시작하여 보철, 교정, 악안면수술까지 전범위로 확대했다. 환자의 대부분은 한국인이고, 외국인과 선교사 가족 환자들은 소수였다. 하지만 진료수익의 상당 부분은 외국인 개인진료에서 충당되었다. 초기에는 무료 환자의 비율이 높았으나 환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비율이 떨어졌다. 진료비는 일반병원의 수가에 준해서 받았다. 1918년부터 미국에서 치과대학을 졸업한 일본인 치과의사 미시나(三品敬吉)가 조수로 고용되어 의대생 강의와 외국인 진료를 했다.

 


한국인 구강상태에 관해서는 일상적인 식생활과 부정교합 발생, 영구치 맹출과 발육 통계에 관한 연구를 계획하였다. 올바른 양치법과 구강병에 관한 대중 교육책자도 발간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선교본부에 방사선 촬영과 치료비를 보조할 집단구강보건관리예산을 요청했다. 항생제가 없던 시기 방사선 촬영은 구강농양의 위험을 예견할 수 있는 획기적인 진단기구였다. 당시 미국은 학교, 보험회사, 자선단체 등에 집단구강검진과 치료기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구강병은 군대지원자를 탈락시키는 두 번째 질병이어서, 군인 500명 당 1명의 치과군의관이 배치되었다.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쉐플리도 징병위원회에 병적등록을 받아야 했다. 쉐플리는 치과의료선교에 예산지원이 안되면 군의관으로 입대할 각오로 선교본부를 설득해냈다. 1920년 11월 안식년을 맞은 쉐플리는 대학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5년간의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쉐플리가 한국인을 위한 윤리적이고 독립적인 치의학 교실을 개설한 것은 한국치의학 교육의 100년을 여는 뜻 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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