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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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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④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5.09.10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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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츠의 세브란스의전 치과센터 건립

<연재순서>
① 우리나라 서양치의학의 시작
② 쉐플리의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선교치과의사 부임까지
③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④ 부츠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센터 건립
⑤ 이유경, 정보라의 유학과 맥안리스 과장
⑥ 해방과 전쟁, 격동기의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⑦ 연세 통합과 세브란스 병원 치과
⑧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 추진 과정
⑨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시작과 현재
⑩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현재와 미래

 

 1. 에비슨의 치과의학교 설립안이 한국에 끼친 영향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입치사제도 철폐를 주장했다. 하지만 총독부는 1921년 2월 ‘조선치과의사시험규칙’을 공포해 입치영업자들이 시험을 통해 치과의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에비슨(O. R. Avison)은 치의학교 신설을 위해 쉐플리 복귀를 청하니, 쉐플리는 “필요하면 개업을 처분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답했다. 같은 해 7월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세부란쓰 병원내에 朝鮮齒科專門校-오십만원의 자본으로 셜립코자 당국에 신청이라는 제목으로 “에비슨이 조선에 치과의학교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조선인을 본과생으로 하는 3개년의 치과의학교를 설립하려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번에도 총독부는 에비슨의 치의학교 설립 신청서를 보류하였다. 총독부로서는 ‘미국인이 대학의 설립에 선수를 친 것은 조선 민중에 대한 일본의 위신과 면목을 떨어뜨리는 일’이고, ‘조선인들이 조선인 치과의사에게 치료를 받음으로써 일본인 개업가에 타격을 입힐 것도 우려했기’ 때문이다.

대신 총독부치과의사시험위원장(1921.8)을 맡아 강습소를 설립하려던 나기라(柳樂達見)에게 ‘경성치과의학교’를 설립하게 했다(1922.4). 한국인들의 ‘민립대학설치운동’도 전국에 퍼졌다. 일제는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1923. 5)하고 법문학부의학부 등 2년제 예과를 설치(1924)하고, 학부를 개설(1926)하였다.

 

2. 치과의료윤리를 강조한 2대 치과과장 부츠(J. L. Boots, 1921. 3 - 1939)


부츠는 1918년에 피츠버그 치과대학을 졸업 후 2년간 임상강사로 근무했다. 당시 피츠버그치과대학은 카네기재단이 후원한 큰 임상진료실과 교정과 보철기공실을 갖춘 학교였다. 부츠는 구강외과를 담당하면서, 대국민 구강보건교육과 의료윤리를 강조하였다.

1934년 ‘한국에서의 치과학의 발전’ 강연에서 “한국 사람들은 결혼비, 장례비 등에 많은 돈을 쓰면서, 치아의 치료비에는 인색하다. 치아가 건강 뿐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에 중요한 요건임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치과의사들의 영리 추구가 계속되면 치과의 의학적 기초는 더 이상의 진보를 멈추고, 구강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의사들과 협조할 능력을 잃게 되며, 속인들의 값을 싸게 하려는 경쟁이 계속될 것이므로 치과의사의 위상을 스스로 낮추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밝혔다.

또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만 한국의 치과의사들도 정부의 치과의료에 대한 감독과 지배, 치료비 관리 등의 문제에 대해 적절히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도 피력했다. 부츠는 부임 직후 압축공기시설을 장착한 췌어를 들여왔고, 최신 장비를 갖춘 치과건물을 짓기로 했다.

3. 치과센터 건축기금 모금과정
“한국은 1800만 명 인구의 가난한 농어업 국가로, 단순한 식생활을 지닌 나라다. 설탕이나 버터, 우유를 접하지 못해 치아우식은 별로 없으나 구강 감염은 많은 편이다. 따라서 한국에 미국의 치과센터를 건립한다면 미국의 과학적인 치과진료를 제공하고,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고, 치의학 연구활동을 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1925년 부츠는 치과건물을 신축하기 위한 기금모금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미국치과의사협회(ADA)는 28,000달러 정도의 연구비와 선교자금을 비축하고 있었다. 쉐플리가 포함된 자문위원단이 모금을 승인했다. 부츠는 10달러짜리 ‘벽돌 만개 팔기’라는 구호를 내걸고 모금운동을 했다.

가족들과 한복을 입고 “우리 모두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진심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립니다. 아이들도 그 곳 활을 즐거워합니다. 일본의 식민지라 어렵지만, 한국인들은 매우 친절하고 농담을 좋아해요”라고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여러 지역 치과의사회를 방문하고, 부인 후로렌스가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부츠는 슬라이드로 한국의 풍물과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을 소개하는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그 결과 1929년 미국치과의사협회에서 1만 달러의 기부금을 약속받고 귀국하였다. 미국치과의사협회는 “부츠와 맥안리스가 운영하다가 때가 되면 한국인들에게 신축건물의 운영을 인계하라”고 지시했다.

 

4. 치과건물 신축
1931년 10월 건평 120평의 3층짜리 미국식 치과종합병원 건물이 완공되었다. 건물 신축을 계기로 세브란스 치과는 최신 설비와 27명의 직원을 갖춘 치과종합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모금부터 완공까지 치과학 교실이 독자적으로 진행하였으므로, 이후 치과 수입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치과의 내규로 ‘순수익의 1/3은 치과시설자금으로 쓰고, 1/3은 치과준비금으로 적립하고, 1/3은 치과의사 양성에 사용하도록’ 이사회에서 결의되었다. 이와 같이,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은 종합병원 규모의 치과건물 신축을 통해 재정적으로 독립하고 치의학 연구와 진료, 수련의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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