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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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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⑦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5.10.02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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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통합과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목차
① 우리나라 서양치의학의 시작
② 쉐플리의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선교치과의사 부임까지
③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④ 부츠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센터 건립
⑤ 이유경, 정보라의 유학과 맥안리스 과장
⑥ 해방과 전쟁, 격동기의 세브란스 병원 치과
⑦ 연세 통합과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⑧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설립 추진과정
⑨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시작과 현재
⑩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현재와 미래

 


1.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통합(1957)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1957년 1월 5일에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두 대학의 통합은 초창기 선교사들의 꿈이었다. 언더우드와 에비슨은 기독교 각 교단이 연합하여 종합대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1929년부터 추진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본격적으로 통합이 추진되었다. 1949년부터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연희대학교 이공대학에 의예과 학생들의 교육을  맡겼다. 또한 1955년부터 연희대학교 대학원에 의학과 석사과정을 신설하여 운영하였다.
통합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연희대학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단과대학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새로운 교명으로 변경하자고 주장했다. 1954년에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병원의 신촌 캠퍼스 이전을 결정하였고, 양교 연석 이사회에서 통합 추진이 결의되었다.
 
1956년부터 두 대학의 합동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이 해 가을에 기금을 지원하던 재미 협동 이사회의 강력한 요청으로 세브란스 의과대학 이사회의 동의를 얻고, 합동 이사회에서 통합에 관한 제반 사항이 통과되었다. 새로운 교명은 연희대학교의 ‘연’과 세브란스의 ‘세’를 합쳐 ‘연세대학교’로 결정되었다.

2.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치과학교실 출범(1957)
세브란스 의과대학 치과학교실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치과학교실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이 당시 교수진은 강사 이동섭과 외래강사 박용덕, 치과의료 선교사 메키너스(John McInnes)였다.

이동섭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치과학교실 조교수 및 치과과장이 되었다. 1943년에 교실에 들어와 1956년부터 세브란스 병원 치과과장으로 일하다가 ‘연세’의 첫 과장으로 1963년까지 재직했다. 이동섭은 ‘장기적으로 치과대학 설립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치과학교실과 치과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연세 통합을 계기로 치과대학 신설 준비를 본격화하면서 설립 계획을 수립하고, 전문과목별 교수진을 영입하고, 시설을 확충하면서 수련의 제도를 정착시키며 치과대학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메키너스는 미국 미네소타 치과대학에서 구강외과를 전공하고 아리조나주 튜손(Arizona Tucson)에서 기독교 치과의사회 활동을 하다가 치과 복구를 위해 1956년에 한국에 파송된 미국 북장로교 소속 치과의료 선교사이다.

 


김귀선은 치과교정학을 전공하여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메키너스의 권유로 1957년 8월에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 부임하여 국내 최초로 전문적인 치과교정 진료를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부속병원에서는 독립적인 치과교정과 진료를 하지 못했고, 전공 교수도 없었다. 김귀선은 1960년에 사임하여 개원하다가 1971년 12월부터 4년 동안 치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게 된다.

김낙희(1951년 입국)는 치주학 전공으로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59년부터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 부임하여 국내 최초로 전문적인 치주과 진료를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치과대학 부속병원에는 치주과가 없었고, 이후에 ‘보존2과’를 ‘치주병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치주과 1호 수련의인 백승호는 인턴, 레지던트 과정(1959-1962)를 수료하였으며,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치과대학의 초대 치주과장을 역임하였다.

 

 

3. 신촌 캠퍼스 시대의 시작(1963)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과 병원은 1962년 5월 6일 신축 교사의 봉헌식 이후 신촌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1963년에 이전이 완료되었다.

서울역 앞 대우빌딩 자리에 있던 세브란스 병원 치과는 1931년에 미국 치과의사협회의 지원으로 부츠에 의해 건립된 단독 건물로서 30년 이상 사용되었다. 치과는 다른 진료과보다 고급 환자들이 많은 상태여서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은 신촌으로 서둘러 이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30여 년이 지난 1960년대 초반까지도 서울역 앞 치과건물은 동양에서 최고의 치과라고 자랑스러워 할 만큼 시설이 좋았다.

특히 2층의 도서실과 세미나 룸은 너무나 유명해서 의과대학의 여러 과에서 서로 사용하려고 경쟁했다. 그렇기 때문에 치과병원은 의과대학 병원보다 1년이라도 더 서울역 앞에 남아 있으려 했다. 

세브란스병원 치과가 신촌으로 이사를 가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은 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도서관 2층 자리였다. 미8군 흉곽병원 한 층의 7개 방을 사용하였다. 새 건물에 릿터(Ritter)나 웨바 유닛체어가 들어가 좋아 보였고, 서울역 치과에 내원하던 환자의 대부분이 따라왔다.

치과과장 이동섭은 1963년 12월에 퇴임하였다. 이 무렵 차장이었던 지헌택은 장로교 장학금으로 미국 미시간 대학원에서 치과보철학을 전공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김낙희가 대리과장에 취임하여 1964년 10월 까지 일했다.

차장이었던 지헌택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치과학 교실 주임교수 및 치과과장 후보가 두 명이 되었다. 당시에는 보직을 임기제로 돌아가면서 맡는 관례가 없었기 때문에 김낙희는 대리과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지헌택은 세브란스 치과학교실에 들어온 지 16년만에 과장에 취임하여 1964년부터 치과대학 설립 초기까지 일했다.

4. 세브란스병원 치과의 수련의제도 정착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1950년대 말부터 체계적인 수련의 제도를 확립하였다. Kim’s Plan(1959)에 의해 치과대학 졸업생들이 대학부속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전문군의관으로 입대하는 수련 제도가 시행되면서 매년 4~5명의 수련의를 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 치과는 인턴, 레지던트 제도를 다른 의과대학이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보다 일찍 정착시켰다. 당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정식으로 인턴 과정을 밟는 인원은 2명 정도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무급으로 조교나 조수 역할을 하던 시대였다.

1960년 초반에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서는 이상철, 이만섭, 구기서 등이 정식으로 미국식 인턴(1년), 레지던트(2년) 과정을 밟았다. 수련 후 군입대시 중위가 아닌 대위로 임관될 수 있었다. 우수한 여성 치과의사들에게 수련 기회를 많이 주었다.


세브란스 병원 치과는 치과전반에 걸쳐 우수한 임상 시술을 할 수 있는 치과의사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수련을 받고 나면 일반 개업의로도 성공적이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분야를 더 연구해 교수 요원으로 진출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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