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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의의 치의학 역사] 대한치과의사협회의 설립일은 고쳐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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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의의 치의학 역사] 대한치과의사협회의 설립일은 고쳐져야 한다
  • 신재의 원장
  • 승인 2016.06.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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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의(대한치과의사학회) 고문

 

현재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원을 1921년 10월 2일에 조선치과의사회의 창립에 두고 기념행사를 해오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행한 조선의 통치처럼, 조선치과의사회가 일본인 치과의사에 의해 그들만을 위한 단체였고, 조선인 치과의사의 권리를 제한하고 핍박한 단체라고 한다면,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원으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원은 고쳐져야 한다.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원은 1981년 4월 25일 제30차 대한치과의사협회 총회에서 결정됐다. 1921년 10월 2일 설립된 조선치과의사회를 기준으로 했다.

1981년 이전에는 조선치과의사회에 대한 연구가 없었으나, 선학들은 협회의 역사로 한국인만으로서 결성된 한성치과의사회를 효시로 보기도 했다. 1990년 이후 조선치과의사회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연구에 의해 조선치과의사회가 조선인 치과의사의 권리를 제한했고 핍박한 단체임이 드러났다.

조선치과의사회에 대한 연구 내용은 이러하다. 조선치과의사회는 조선에 있는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입치사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행정적인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다. 성격은 공법인으로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위생행정사무에 공헌하는 것을 목표했다.

조선총독이 일본인이었던 것처럼 조선치과의사회 회장은 일본인으로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 이이다 데쓰(飯塚徹),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소토 케이죠(外圭三),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가 역임했다.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조선치과의사회에 가입했으나 소외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조선치과의사회는 활동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 관계당국 및 의료계와 협의했다. 1921년부터 일제는 입치사 문제를 치과의사시험제도로 해결하려 했다. 조선치과의사회는 입치사의 단속, 제도의 폐지와 치과의사시험제도 폐지를 요구했다.

1935년 9월 25일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가입시켰다. 1940년 일제는 ‘시국 정세’를 구실로 조선치과의사회를 도별 치과의사회로 발족시켰다. 법정치과의사회 설립의 전제로서 단체의 통제 및 자재배급, 업권의 옹호와 발전이 그 목적이었다. 도별 치과의사회 설립에는 관권에 의한 강제가 작용됐고, 도별 치과의사회 설립 이후 통제가 강화됐다. 이 도별 치과의사회의 권리는 제한되고 의무는 강화된 식민지 상황에서 적합한 형태였다.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충치예방의 날’ 행사는 ‘시국 정세’의 영향으로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협력해 행사를 하며 특징적인 것은 군대의 교련을 이닦기에 도입한 치마교련이었다.

금사용 규제는 치과치료의 제한으로 작용했다. 1939년 말 금사용 규제가 강화돼 치과의사는 대용할 다른 재료를 찾아야 했다. 일제는 대용합금을 개발하게 하고 시연하며 치과의사들에게 이를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조선치과의사회는 개발된 대용합금을 학문적으로 알리기까지 했다.

치과재료의 부족으로 조선치과의사회와 조선치과용품상조합은 영업 통제에 의해 치과재료를 조선인 치과의사와 일본인 치과의사 사이에 차등배급하게 됐다. 1941년 이후 조선총독부는 고시로써 공정판매가격을 결정했으나 치과재료의 수급은 원활하지 못했다.

1925년 3월 21일 동아일보 가십(gossip)란 ‘휴지통’에 이러한 기사가 있었다.

 

『경성치과의사회는 회원 20여 명 중 조선 사람으로는 함석태 씨 한 사람이 섞여 있었는데 사회봉사사업으로 시내 일본 소학교아동에게 구강진찰을 해오던 중 함석태 씨가 종로 소학교를 받게 됐으나, 그 학교 교장 片岡이라는 사람은 조선사람 의사는 우리 학교에 일이 없다고 거절을 했다던가. 아가리로는 소위 일선 융화를 부르짖는 자들이 모다 이 모양이다. 조선 사람의 손에 입을 벌려 나를 보이는 것이 그다지 대화민족의 수치가 되더란 말인가? 그 따위 것들을 드러내 말할 거리도 못되고 토심스러운 일이 그 뿐이랴 만은 휴지통이니까 한 자루 쓸어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인 치과의사에 대한 일본인의 편견과 무시를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는 한국인만으로 조직된 치과의사회였다. 설립의 동기는 이러하다. 함석태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치의학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증진시키려 했고, 또한 후진의 앞길을 열어주는 책임과 사회에 봉사하려 했다. 회원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한국인만의 치과의사회의 필요성을 공감하기도 했다.

1942년 10월 1일 경성치과의사회는 한국인의 한성치과의사회와 일본인의 경성부치과의사회 통합을 이뤄 일본인 치과의사가 일방적으로 회를 주도하게 했다. 한국인 치과의사는 회의 구성원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치과의사는 단체활동을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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