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까요? 늘 말씀 드리지만 실제상황이 담긴 이야기들이 재미있는 법이지요.
이 역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때는 1944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가던 마지막 겨울, 네덜란드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완전히 포위되어 약 6개월 동안 극심한 기근을 겪게 됐다.
이 것을 ‘Dutch Hunger Winter’라 칭하는데, 1945년 5월 포위가 풀리기 전까지 그 짧은 기간 동안 약 20,000여명이 사망했고, 근대 문명 사회에서 보기 힘든 최악의 영양 환경이 네덜란드 국민에게 가해졌다. 마침 네덜란드의 의무 기록이 잘 되어있던 탓에 의료 역학 연구자들은 기근이 인간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 정신이나 이를 이용한 연구열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결과였다. 가장 주목할 점은 기근 기간에 임신을 하고 있던 산모들은 대부분 저체중아를 출산했고, 이 아이들은 놀랍게도 성인이 된 후 비만율이 유의하게 높았다.
이 외에도 당뇨와 같은 대사 질환이 많이 발병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드리 햅번 역시 이 Dutch Hunger Winter를 겪은 피해자였고, 잘 아시다시피 평생을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며 결국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21인치 허리가 사실은 어린 시절 겪었던 기근 탓이라고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이 일화에서 가장 기묘한 사실은 Dutch Hunger Winter를 겪은 피해자의 손자 세대에서도 저체중 출산이 유의하게 많았고, 각종 우울증, 정신분열증도 대조군에 비해 높았다는 점이다. 산모의 환경영향이 어떻게 F1세대 자식뿐 아니라 F2 손자세대까지 전달된 것일까? 이러한 현상은 1968~1970년 Biafra 기아, 1958~1961년 중국 대기근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된다.
DNA는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 정보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면서 염기서열이 바뀌게 된다면 그것은 돌연변이가 되어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순서에는 변화가 없되 염기의 부속 기관이나 크로마틴의 꼬인 형태가 바뀜으로 인해 표현형이 바뀌는 현상이 바로 후생학적 변화(Epigenetic Change)이며, 현재 과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다.
임산부의 몸조리 즉 태교가 자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잘 아는 우리 한민족에게는 그리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러한 영향이 손자 세대까지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놀라운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 내가 먹는 이 음식, 내가 선택한 환경이 나의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행동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후생유전학 분야는 성인 시기에 겪은 경험들 특히 주변 환경 인자들이 우리의 몸은 물론 후손의 건강까지 바꾸어 놓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환자는 현재 시점의 환자 그대로 이기도 하지만 1대, 그리고 2대 어쩌면 그 전으로부터 이어지는 긴 영향력의 지배하에 있는 존재일 수 있다.
그렇기에 최근의 환자의 위험인자 분석(Risk Assessment) 시에 현재 보유 질병이나 악습관 확인뿐만 아니라 환자의 Epigenetic Alterations을 평가하는 것이 의미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환자분의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라고 환자에게 물어야 하는 시대가 오지는 않을까?
거대한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작은 점에 불과한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는 겸허한 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