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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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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①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5.08.2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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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양치의학의 시작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우리나라 치과계가 서양 근대치의학 교육의 문을 연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미국 선교치과의사 쉐플리(William Jeremiah sheifley)는 1915년 11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한국 최초로 치과학교실을 설립하여 치의학 교육과 진료 및 연구를 시작함으로써 한국 근대치의학 역사의 첫 장을 열었습니다.

본지는 근대치의학 100주년을 맞이해 ‘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역사편찬분과’와 함께 10회에 걸쳐 특집기획을 연재합니다. 연세치의학의 역사와 우리나라 치과계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조명하고자 합니다<편집자주>.

 

1) 알렌의 등장과 제중원의 설립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불이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갑신정변이었다.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열세번이나 찔려 쓰러졌다. 귀에서 뺨까지 베인 볼 살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한의사 열 네 명이 상처에 고약을 바르며 침을 놓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는 선교사 신분을 숨기고 미국공사의 의사로 근무하던 알렌(Horace N. Allen)에게 치료를 맡겼다. 알렌은 럼주로 상처를 소독하고, 명주실로 혈관을 잡아매고, 스물일곱 군데를 꿰맸다. 열이 오르는 고비를 넘겨 생명을 구했다. 고종과 민비는 서양식 수술의 기적과 같은 효험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다.

알렌은 서양식 대민 진료기관과 한국인 의료인을 양성할 학교 설립을 제안했다. 고종은 운영비를 지원하고, 선교의사들이 무급으로 근무하는 형식으로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설립됐다. 고종은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라는 뜻인 ‘광혜원’이라는 이름을 2주 만에 ‘백성을 구하는 집’이라는 ‘제중원’으로 바꿔 하사했다. 

2) 제중원에서 시작한 치과치료와 발치교육

 

 

 

 

 

알렌은 한국 최초로 악안면수술과 발치를 했고,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에는(1885. 4-1886. 4) 구강질환 처치에 관한 질병별 통계가 기록돼 있다.

1886년 3월 제중원 의학당도 개교했다. 1893년 에비슨(Oliver R. Avison)은 고종에게 건의하여 재정난에 빠진 제중원을 선교부의 독자적인 사업으로 이관했다. 콜레라 방역국장을 맡아 의료조수들을 훈련시키고 제중원의 한옥구조를 현대식으로 개조하고자 했다.

1900년 에비슨은 뉴욕에서 열리는 ‘만국 선교 대회’에 참가해 ‘의료 선교에서의 우의'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의료선교활동에 공감한 석유회사 회계담당자 세브란스는 서울에 현대식 병원을 짓는데 1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했다. 에비슨이 세브란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자, 세브란스는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주는 내 기쁨이 더 큽니다”라고 답했다. 세브란스의 기부로 병원이 지어지는 동안 제중원 의학당에서 최초의 치과의술 교육이 이뤄졌다.

1901년 제중원의 ‘의료활동보고서’에는 의학생들이 274개의 치아를 에비슨의 자문을 구해 직접 발치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것은 발치기술이 선교의사에 의해 의학생들에게 교육된 최초의 기록이다. 따라서 제중원을 근대치의학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의사들이 시술하는 외과학의 일부가 아니라 치과의사에 의해 구강악안면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진료와 정규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15년 쉐플리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 교실을 개설하면서부터다.

3) 고종과 일본인들의 치과치료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대한제국(1897-1905)을 선포한 고종은 1900년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절충한 의사규칙과 약종상규칙을 반포했다.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 오지(野田應治)’는 ‘개업 10주년 기념(1903), 치료비 30~50%할인’광고를 냈다. 노다 치과 근처에서 일본인 입치업자 고모리(小森, 1902)가 ‘치과시술소’를 개업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치과의사와 입치업자를 구별하지 못했다. 고종의 앞니가 ‘조개 속 돌을 씹어 부러지자’ 처음으로 치과의사란 존재를 알게 됐다.

치과의사 소어스(Souers)가 고종의 구강에 ‘두 개의 사기질 치아를 금죔쇠로 붙였던 것’이 1903년이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노다는 육군을 따라 자원종군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국제적으로 조선 지배를 승인 받기 위해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조선정부는 치과의사법이나 교육체계를 마련할 여력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에게 그 주도권을 넘기게 됐다.

 

 

 

4) 한대위(韓大衛, David Edward Hahn, 1874-1923)의 치의학교 설립안

“아, 서양인이 만리 해외에서 건너와 한국의 문화를 도와 한국 사람들의 지식을 자라게 해, 한국 운명의 앞길을 밝히는 것을 우리 모두 실로 환영하는 바이다,(···) 한 대위가 치과의학교를 창립하면 그 효과가 반드시 제중원과 맹아학교에 못지않을 것이다”

1909년 10월 30일 대한매일신보 사설에서는 한 대위가(韓大衛, David Edward Hahn, 1874-1923)가 한국인을 위한 치과학교를 세우려는 것을 대서특필했다. 1906년 한국에 들어온 5개월간 감리교 선교치과의사로 활동하면서 한 대위는 무료진료소를 열고, 세브란스병원과 이화학당, 고아원 등과 연계해 치과진료를 하였다. 이와 함께 교회청년회나 YMCA 등의 단체를 통한 복음전도와 애국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한대위는 한국인 치과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남대문에 있는 자신의 치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제중원에 새 건물이 지어지면 세브란스병원 의학교와 연합할 계획이었다. 에비슨 역시 제중원 의학교에 치과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대위의 치과의학교 설립 계획은 일본통감부에 의해 ‘보류’ 형식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통감부는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일본 정부는 1906년 치과의사법이 제정되어 본토에서는 불법화된 입치영업자와 같은 의료업자들의 한국 이민을 권장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중원의 의학교육에 이어 치의학 교육에 있어서까지 미국에게 기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한대위의 치의학교 설립안은 좌절되었다.

이로써 한국인 치과의사들에 의해 근대 치과의료체계가 형성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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