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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호 원장의 역사 이야기]미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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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호 원장의 역사 이야기]미실5
  • 안승호 원장
  • 승인 2013.07.0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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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기를 진평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아직 열 셋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가 보명과 미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왕을 이끌어 잘 보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보명은 당시 석명을 가진 지 석 달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양하고 미실이 먼저 왕의 사랑을 받았다. 이로써 왕이 비로소 양기를 통하게 되니 스스로 보명궁에 이르러 이끌어 달라고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진평왕의 할머니 사도태후가 왕의 성교육을 보명과 미실에게 맡긴 거죠. 보명과 미실은 할아버지 진흥왕도 모셨고 개한테 물려 죽은 아버지(동륜태자)도 모셨던 여인들이에요. 사실 이런 예는 서양 역사에서도 그렇고 흔히 보는 내용이에요. 전에 썼던 ‘카뜨린느 드 메디치’에서도 보면, 프랑스 왕이 자신의 정부情婦인 백작부인 다이아나에게 왕자 앙리의 성교육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하죠. 아버지의 여자를 내가 공유하다니! 지금이야 황당한 얘기지만 이런 것도 터부일 거에요. 그런 터부가 없었던 시절에야 뭐.
606년 미실(약 60 세로 추정)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했어요. 설원이 밤낮으로 옆에서 돌봤습니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마다 기도하였어요. 마침내 설원은 소원대로 미실의 병을 대신하였고 죽었어요, 미실은 나았구요. 설원의 나이 58세, 혈통이 좋지 않았지만 미실의 총애를 받아 풍월주도 되고 신라 상류층에 원효대사와 설총 등을 후손으로 남겼으니 나름 럭키한 삶을 살다 갔다고 하겠네요. 이 이후 <화랑세기>에 미실에 관한 내용은 별 게 없어요. 미실의 막내 아들이 설원의 자식이였는데 미실의 사랑이 깊었어요. 미실은 자신의 아들을 김유신에게 부탁합니다, 나이는 김유신보다 많았지만.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부계로는 가야이고 모계로는 <대원신통>계였어요. 당시 남자는 당대에 한하여 모계를 따른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서현은 <대원신통>으로 분류되었고 <진골정통>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은 <진골정통>이였고 만명과 서현 두 사람이 사랑을 할 당시에는 <진골정통>계가 권력을 쥐고 있었어요. 당시 <진골정통>의 보스는 지소태후(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였어요. 지소태후는 만명의 외할머니였지만 <진골정통>의 종통으로써 서현과 만명의 결혼 불가를 명령하였어요. 결혼이 허락되지 않자 둘은 도망갔어요. 도망가서 애들 여럿 낳고 잘 살았습니다, 충북 보은에 살았는데 그곳에서 가야계를 이끌고 살면서 백제와의 접경지대에서 변경 수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유신의 경우 유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소태후가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수도 서라벌로 돌아올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미실의 <대원신통>에서 권력을 쥐었으니 돌아온 거에요.


그렇다면 김유신은 엄밀히는 <진골정통>(어머니 만명이 진골정통이므로)이지만 <대원신통>의 포용 속에 귀환한 것이죠. 그것도 미실의 화합 정치? 속에 가야 왕족계의 혈통 서현이 귀환하는 거에요. 미실이 진지왕 쪽에서 문노의 가야계를 전략적으로 포섭해 오면서 가야계 포용 정책의 일환으로 서현 건도 함께 해결된 것입니다. 암튼 김유신은 미실 라인이에요. 김유신은    <진골정통>의 혈통이고 <대원신통>와 친밀하였으며 가야계를 아우를 수 있는 그야말로 신라의 파벌을 화합으로 이끌 수 있는 피를 타고난 사람이였어요.
미실 4 마지막 부분에 선화공주 얘길 했었어요. ‘서동요’로 전해지는 그 이야기의 오리지날 원본은 사실 서현과 만명의 이야기에요. 서현과 만명의 사랑 이야기가 선화공주와 무왕의 사랑 이야기로 바뀌어 구전된 것이죠. 진평왕에게는 선화라는 공주도 없었고 백제 무왕 측 기록에도 신라 공주 얘기는 없어요. 이 이야기가 서동요로 바뀌게 된 이유는 아마도 ‘무’왕이라는 단어 때문일 거에요. 김유신은 죽은 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됩니다. 서현과 만명 둘이 도망가서 살다가 다시 귀환하고 아들 김유신이 왕으로 추존되고 그런 얘기가 이래저래 바뀌어 서동요로 전해진 거에요. 진평왕에게는 천명공주, 선덕공주 이렇게 둘 뿐이였어요.


자, 그리고 한가지 더 김춘추의 출생 과정에 대하여 얘기할까 합니다. 진흥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어요.

동륜태자와 그의 동생 금륜태자. 동륜태자가 개한테 물려 죽자 금륜이 태자가 되었어요. 동륜태자가 개한테 물려 죽기 전에 지도부인은 동륜태자 궁에 소속이였어요. 지도부인은 원래 동륜의 아내였다가 동륜이 죽자 동생 금륜의 아내가 된 것이죠, 전형적인 형수 수취제이고 유목민의 풍속입니다. 동륜태자가 죽자 금륜태자(진지왕)는 지도부인을 왕후로 삼고  용수, 용춘 두 아들을 낳았어요. “용수는 동륜의 아들이다 라고 혹은 금륜의 아들이다 라고 하는데 그 진실은 알 수 없다”라고 <화랑세기>는 전합니다. 어찌되었든 용수와 용춘 형제는 진평왕을 아버지처럼 받들었다고 합니다(진평왕과는 사촌 형제이지만 나이 차이가 꽤 낫는 지). 두 형제의 어머니 지도부인이 진평왕의 후궁이 되었기에 진평왕을 아버지로서 받들었습니다. 진지왕의 왕비가 지도부인인데 진지왕이 죽자 진평왕이 숙모를 후궁으로 삼은 것입니다. 미실이 시킨 것이겠지만, 지도 부인 또한 가야계니까 가야계 위무차원에서 그랬겠죠.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천명공주와 선덕공주 딸만 둘이였어요. 진평왕은 사촌 동생 용수와 용춘 중에서 兄 용수를 자신의 큰 딸 천명의 배필로 삼아 결혼을 시켰어요. 용수와 천명 사이에서 김춘추가 태어났어요. 그러나 천명 공주의 마음은 시동생 용춘에게 있었어요. 천명은 용춘에게 러브 콜을 했고 용춘은 감응하였습니다. 천명의 어머니 왕후 또한 용춘과 천명의 잠자리를 제공하니 용수는 완전히 새鳥 되었어요. 용수는 말로만 왕의 사위지 완전히 동생 용춘에게 밀려난 처지가 되었어요. 용수는 늘 병을 핑계로 동생 용춘에게 천명공주를 모시도록 하였습니다. 용수는 죽으면서 아들 춘추와 법적 아내 천명을 용춘에게 정식으로 양도합니다. 진평왕이 선덕에게 왕을 하라고 하자 선덕은 용춘이 자기를 도와주면 왕 노릇하기 어렵잖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선덕 또한 용춘과 합궁하겠다는 의지를 아버지 왕에게 전한 것입니다, 형부랑 하겠다 이거죠. 용수보다는 동생 용춘이 더 잘났었나 봐요. 선덕은 용춘에게 색공을 요구하였으나 아이가 안 생기자 兄 용수하고도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래도 선덕의 자식은 없었어요. 결국 선덕 천명 자매와 용수 용춘 형제는 배우자를 스와핑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이 스와핑의 결과물이 바로 김춘추였어요, 그들 모두의 자식이죠.


왕으로서 모든 계파를 다 수렴한 김춘추와, 귀족으로서 신라의 모든 파벌을 다 화합으로 이끌 수 있는 김유신 이 두 인물의 만남은 가히 놀랍다 하겠습니다. 거의 모든 계파를 아우르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힘을 합했는데도 ‘비담의 난’이 일어나죠. 비담의 난은 석(석탈해)씨 왕의 후손들이 일으킨 난이에요. 이 난이 일어나자 선덕여왕은 놀라서 죽었어요. 김유신에 의하여 난이 진압되고 석씨 10족을 멸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어요. 3족도 아니고 10족이라면 석씨 아는 사람은 다 죽여버린 거에요, 10족의 범위란 엄청난 Broad Spectrum입니다, 정확친 않지만 10족의 범위엔 걍 옆집도 있을 거에요. 박朴, 석, 김金 이 신라 왕 성姓인데 석씨가 없는 이유에요. 의도적으로 석씨 제거를 완전하게 perfect하게 하기 위하여 난을 유도했을 수도 있죠. 이러한 철저한 반대 세력 진압 후 김유신과 김춘추는 국가를 진정한 하나로 만들 수 있었어요. 이러한 국가 통합이 있었기 때문에 백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침략을 무찌를 수 있었던 거에요. 중앙집권이 아닌 봉건제였던 시절엔 단합이 참 어려웠던 문제였죠. 신라가 당나라 군대 20만 명을 무찌르고(매소성 전투) 진정한 한반도 2/3 의 주인이 되었던 바탕에는 신라의 국론 통일이 어떤 식으로든지 이루어져 있었던 거에요.


미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는 읽은 사람 마음이에요. 결과적으로 미실이라는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자 덕택에 신라의 정권은 안정적이였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내분은 없었다는 거죠. 중앙집권이 요원하던 고대국가였어요. 왕권이 조금만 약해지면 그 틈을 노리는 세력이 준동을 하게 되죠. 백제가 계백의 5,000명 황산벌 전투 외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는 것은 바로 지방 호족들이 의자왕을 돕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백제가 망한 게 의자왕과 호족(22 담로)간의 내분, 즉 권력 다툼이였기 때문이듯 어찌되었든 안정적인 정권의 마련을 미실이 이루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군요. 미실에 대한 기록은 612 년 이후 없으므로 545 년부터 612년까지 최소 67세는 살았어요. 며칠 동안 미실에 집중했더니 미실하고 연애를 한 것 같은 느낌이군요. 총명한 지체 높은 귀부인이였고 강한 포스가 있었어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였어요. 고현정은 미실에 잘 어울리는 배우였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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