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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로망, 현실, 그리고 또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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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로망, 현실, 그리고 또 로망
  • 이수형 원장
  • 승인 2013.11.18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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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늦가을이 어느새 초겨울로 넘어가지만 아직 낙엽을 보면 문득 감성이 솟구치곤 한다. 로망의 계절, 가을을 타나보다. 이럴 때는 오지도 않을 환자를 기다리느니 하루 비우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개원의의 낭만이다.

오후 진료를 비우고 세종문화회관에서 11월 25일까지 하는 라이프 사진전을 다녀왔다. 전시된 전쟁과 일상 속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사진들 중에 눈이 먼 의사가 3개월된 아기를 검진하는 흑백 사진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알버트.A.내스트는 프랑스 파리 동쪽에 있는 Chelles에서 개원한 의사였는데, 10년차가 되던 1931년에 실명해 버렸다. 하지만 부인과 직원의 도움으로 포기하지 않고 이후로도 22년간 의사 직무를 수행하였고, 4000명의 신생아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헌신하는 눈먼 시골의사에 대한 신뢰를 결코 버리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 주의가 필요하다. 전쟁의 상흔 속에 수가 적어 의사가 귀한 의료적 시대 상황, 당시의 의학 수준, 결국 간호사와 부인의 도움으로 운영 가능했던 점 등 싸구려 감성팔이를 견제하기 위해 따져봐야 할 요소는 많다. 하지만 그런 곁가지들을 떼고 보아도 그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훼손되지 않는다. 의사가 눈을 못 봐도 환자는 믿고 몸을 맡긴다. 사진 속 내스트가 눈을 감고 아이의 등을 청진하는 모습이 의사와 환자의 소통, 나아가 관계성을 은유하며 함축하는 감동이 있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직업의 ‘기본 전제 조건, 혹은 핵심 능력’을 상실하고도 그 직업을 훌륭히 수행해내는 사람들은 늘 있어오지 않았는가.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인간 승리의 주인공’들은 후세에 많은 영감을 주고 귀감이 되기 마련이다.
 

미국 시카고 최고의 레스토랑 Alinea의 요리사 Achatz는 설암(scc) 4기로 림프절의 절제와 약물과 방사선을 동반한 강도 높은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는 수술로 혀를 절제하지는 않았지만, 항암 치료 이후 미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요리사로서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밀크쉐이크의 단맛조차도 못 느끼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본인의 열정과 동료들의 도움으로, 그의 레스토랑은 세계에서 가장 예약이 어려운 식당으로 꼽힐 만큼 번창하고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요리에 매진하며, 먹는 이와 교감하며 요리사로서의 핵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는 점차 단맛, 쓴맛, 짠맛 순으로 미각을 회복하는 중이라고 한다. 요리사에게 절망 그 자체인 무미의 세상에서 살다가 조금씩 희미하게 감각이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가 다시 찾은 단맛은 과거의 단맛과는 분명 다른 것일 터이다.

몇 년 전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를 보면, 느낄 수 있는 맛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그 관계성과 상호 작용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항상 결핍과 부재를 통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기 마련이다. <우리가 치과의사이게 하는 핵심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으로는 수많은 가치들 사이에서 헤매기 십상이다. <무엇이 결손 되면 우리가 더 이상 치과의사가 아니게 되는가>로 질문을 바꿔보자.

번화가 사거리마다 넘치는 치과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교감과 소통에 목마르고 신뢰할 수 있는 치과의사를 찾아 헤맨다. 그런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기는 어려운 개원가의 현실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피드백 되고 내면화 된다. 치과의사로서 품었던 패기나 꿈꾸었던 이상은 어느새 낭만이 되고 로망이 되는 듯하다. 로망이면 또 어떠한가. 수많은 현안들이 뒤얽힌 치과계에서 어떠한 치과의사가 될 것인지는 결국 개인의 몫이다.

가끔 복기해줘야 안 잊어버린다. 해보니까 겨울에 더 가까운 늦가을 오후 진료 비우고 코트에 손 푹 찔러 넣고서 길가에 아직 남은 젖은 낙엽 밟으면서 로망을 몰래 혼자 슬쩍 꺼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연세루트치과 이수형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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