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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리 에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번역스러움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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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리 에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번역스러움의 미학
  • 차현인 원장
  • 승인 2015.01.22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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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인(여의도 백상치과) 원장

 

 

여의도 백상치과 차현인 원장

나는 번역 문학이나 번역 영화가 좋다.

그리고 지나치게 완벽한 번역도 좋지만 약간 외국말투가 나는, 그래서 약간은 억지스러운 번역을 더 좋아한다.

어렸을 때 KBS 명화극장에서 오스카상 딱지 하나 붙고, 흑과 백으로 자연 뽀샵(촬영 후 보정)된 서양 영화를 볼 때도 이상하게 귀로 들리는 성우들의 버터발린 말투가 멋있게 느껴졌었다.

겨울밤 TV 맞은 편 따뜻한 아랫목에 누나와 함께 다정히 기대앉아 두꺼운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말똥말똥 몰입하던 먼 나라 이야기가 왜 그리도 달콤하던지!

잘 생기고 예쁜 주인공들의 입놀림과 우리말 발음이 서로 안 맞을 때 그 시각과 청각의 부조화를 감지하는 내 공감각적 신경세포는 또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자고로 번역은 상업적이어서 좋다.

 

창작물은 굳이 돈을 생각하지 않고 표현본능에 의해 쓰여지는 경우도 많지만, 외국의 어떤 글이나 영상물을 번역하고자 하는 일에는 항상 누군가의, 누군가를 위한 투자와 수익성이 개입한다.

이어서 번역가가 동원돼 그들의 숭고한 미션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한다.
현재와 같이 많은 번역의 달인들이 두루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들의 노력에는 자연히 경쟁이 수반된다.

결국 번역물에는 창작본능과 생존본능이 결합된, 좀 더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자연’과 ‘문명’이 공존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모국어 창작물이 작가의 아집과 독선, 즉 ‘에고(ego)’가 말끝 하나하나까지 지배의 손길을 뻗치는 반면, 번역물은 외국어 창작자의 에고를 적절히 완화하거나 좀 더 수용 가능한 형태로 순화시키는 게 가능하다.
여기에서 창작인과 번역인의 뜻하지 않은 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어를 잘 아는 독자라면 원문과 번역문이 갖는 교집합과 차집합을 끄집어내고 비판하는 지적 활동의 재미까지도 어렵지 않게 누릴 수 있으며, 좀 더 차원 높은 독자라면 이른바 ‘번역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의 경지까지도 맛볼 수 있는 특별한 행운도 누린다.

나는 이국적으로 번역된 글이 좋다.

구체적으로는 우리말과 어순이 완전히 다른 언어 즉 우랄 알타이어와 멀리 떨어진 계통의 언어를 힘겹게 번역한 문장일수록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런 번역물에는 이질적인 민족 간의 혐오감과 호기심이 물과 기름처럼 버무려져 있고, 땡전 한 푼 없이 해외의 명소는 물론 그들의 영혼의 동굴까지 탐험할 수 있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여행 상품권이 감춰져 있지 않던가.

모든 번역문의 어색함과 더불어 그 도도한 화려함에 늘 감사한다.

“시내가 온통 썰렁해. 차들은 왼쪽 뒷바퀴를 장례식 화환처럼 검게 칠하고 다니고, 노스 쇼어에선 아예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있더군”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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