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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리 에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악처와 함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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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리 에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악처와 함께 춤을
  • 이현정기자
  • 승인 2014.07.17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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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인 (여의도 백상치과) 원장

당신에겐 혹시 ‘악처’가 있는가?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아내는 스스로를 악처라고 부른다. 물론 위악적(僞惡的)인 태도일 것이다. 내가 결혼 20여 년간 면밀히 관찰한 결과 그녀는 단순한 악처라기보다는 ‘현모악처(賢母惡妻)’에 더 가깝다.

부부 간에는 사랑이 기본이고 나 또한 애(愛)처가이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그게 그리 쉽지는 않다. 가정을 진취적으로 일궈가는 데는 ‘아내에 대한 사랑’보다는 ‘아내에 대한 경외심’이 훨씬 더 큰 동력(動力)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방향으로 부부관계를 이끌다 보니 아내의 ‘악마적 본성’이 어쩌면 필요악처럼 보인다.

오랜 결혼생활에서 터득한 이른바 ‘악처의 조건’을 들어보면 이렇다.

1) 남편의 계획에 반대부터 하고 본다.
그래서 참 꽉 막힌 여자라는 생각이 들고 남자가 확신에 가득한 계획이 있다면, 일단 저지르고 난 다음 나중에 기회 봐서 털어놓게 된다. 아내가 제아무리 악처라고 해도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까. 한마디로 ‘저지르지 않으면’ 도무지 남자로서 큰일을 할 수가 없다(예를 들어, 내가 광고회사 때려치우고 다시 다른 공부하려고 할 때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2) 남편의 말따위는 경청하지 않는다. 
남편에게 무언가를 물어놓고 나서 남편이 대답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화제를 엉뚱한 데로 돌린다든지, 말을 끝까지 할 기회를 주지 않고 중간에서 끊는다. 이럴 때 기분이 무척 상하지만 그냥 적응하려고 애쓴다. 혈압이 약간 올라가는 정도에서(악처가 갖는 약간의 카리스마).

3) 남편의 건강관리에 유달리 신경 쓴다.
돈 벌어오는 남편, 부려 먹을 수 있는 남편이 아프거나 빌빌거리면 가정경제가 위태로워지고, 결국 자기와 자식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기 때문이다. 아침만은 꼬박꼬박 먹이고, 운동을 게을리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왕성한 체력으로 오래오래 ‘앵벌이’ 역할을 해내도록 독려한다.

4) 개별경제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딴 주머니’는 절대로 차게 하거나 스스로도 차려고 하지 않는다.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의 원칙이 지켜져야만 자신과 자식의 감격스러운(?) 목표를 조기에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처가 다스리는 집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저녁에 샤워라도 하고 나오면 몸 닦을 수건이 차곡차곡 접혀 있고, 몸을 감쌀 수 있는 속옷이 그 악랄한(?) 손놀림으로 잘 개켜져 있다.

간단한 아침상을 차려놓고도 담 넘어갈 정도의 고함을 지르며 깨우는 사랑스러운 폭력도 있고, 잠결에 잠꼬대하거나 코를 골더라도 반대편을 향해 내지르는 멋진 예의까지!

이따금 소크라테스가 받았음직한 철학적 고민도 듬뿍 안겨주는 악처…….

악처를 모시고 사는 쌉싸름한 이 맛을 현모양처를 둔 남자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 글도 아내의 눈을 피해 진땀 흘리며 쓰고 있다. 스릴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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