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모 원장의 마음의 창] 우리는 남의 말을 잘 듣는가?

김관모(김관모치과) 원장

2018-08-16     김관모 원장

자폐아 중에는 소리에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아이들 중에는 기차가 지나가기 5분이나 10분 전에 벌써 기차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도 있다. 또 이런 사례도 있다. 한 어머니가 자폐아를 데리고 창문이 닫힌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다. 아이가 갑자기 비행기가 지나간다고 외치는 것이다. 당시 식당에는 TV가 켜져 있었지만 비행기가 나오는 화면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지금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어머니는 믿을 수가 없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 밖에 나와서 하늘을 보니, 과연 비행기가 지나간 자국이 하늘에 길게 나 있었다고 한다.

자폐아를 만나보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대개 딴청 부리기 일쑤인 것이다. 그런 걸 보면서 우리들은 자폐아가 잘 듣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의하면 자폐아의 귀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들을 수 있는데 왜 그들하고 대화가 안 되는 것일까?

자폐아가 듣는 방식이 정상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정상인들은 귀로 듣는다. 그런데 자폐아는 몸으로 듣는 것이다. 토마티 박사는 뼈 전달방식으로 듣는다고 했다. 따라서 토마티 방법을 실천하는 전문가들은 자폐아의 듣는 방식을 바꿔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 토마티가 발명한 ‘전자 귀’를 사용한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공기를 통한 귀로 듣도록 바꾸어 준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의 행동이 달라진다고 한다. 갑자기 말을 하고 싶어 하며 사람들한테도 관심을 보인다.

토마티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일단 어머니의 목소리를 녹음한 것을 사용한다.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듣던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서다(하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를 사용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모차르트 음악을 사용한다).

이때 어머니의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8000Hz 이하의 낮은음을 소거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듣던 것과 유사한 소리로 만들어 들려준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양수에 의해 낮은음이 소거되기 때문이다. 환자가 소리에 익숙해지면 점진적으로 낮은음의 소거 정도를 줄여 공기 속에서 듣는 것과 유사한 소리 형태로 바꿔준다. 낮은음이 소거된 어머니의 목소리는 환자의 귀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발달 과정의 고리를 되찾게 해준다. 마치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왔던 길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목소리 일부를 소거해 들려주자면 특수한 장치가 필요하다. 

토마티는 이를 위해 ‘전자 귀(Ear)’라는 전자 장치를 발명했다. 토마티 방법의 핵심을 이루는 이 전자 귀는 테이프 카세트나 CD 연주기에 연결해서 사용하는데, 우리의 가청영역인 16Hz에서 2만Hz 사이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고안돼 있다.

양쪽 귀에 쓰는 헤드폰에는 소리가 환자의 귀에 들리기 전에 먼저 두개골에 전해지도록 헤드폰의 꼭대기나 귀밑에 ‘에너지 변환기(소리를 운동 에너지로 바꾸어 주는 변환기)가 부착돼 있다. 이렇게 해서 헤드폰에서 나오는 소리는 먼저 운동 에너지로 변환돼 뼈 전달 방식으로 두개골에 전해지며, 잠시 뒤에 같은 소리가 귀를 통해서 전해지도록 돼 있다.

처음 변형된 어머니의 소리를 들으면 자폐아는 어머니의 품으로 다가와서 신체 접촉을 늘린다고 한다. 그리고 손가락을 빠는 것과 같은 자궁 내에서 했던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엄마를 껴안기도 하고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하게 된다. 

훈련이 지속됨에 따라 그는 잘 훈련된 귀를 갖고 있는 사람이 듣는 것처럼 된다. 이것을 통해 환자는 그의 중이(中耳)의 이완된 근육들을 강화하게 되며, 듣기 능력은 개선된다. 이 전자 귀는 환자의 듣는 습관을 바꿔 주기 위한 것이며, 대개 두세 달 동안 전자 귀 훈련을 받고 나면 합창단의 노래를 듣고 즐길 수 있게 된다. 

왜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할까?

나는 생각해 본다.

들을 청자를 보면 귀耳를 王으로 모시고 十四 번을 一心으로 듣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듣는 것을 신중하게 하고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단어라고 본다.

요즘은 어떨까? 남의 말을 잘 듣고 있는 사회인가? 

목소리만 크게 하고 남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과 집단은 아닌가? 

우리도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듣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