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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욱 공보의의 사랑니] 미용실 의자에 앉으니 치과에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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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욱 공보의의 사랑니] 미용실 의자에 앉으니 치과에 온 것 같습니다.
  • 이은욱 공보의
  • 승인 2020.10.22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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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반 혹은 두 달에 한 번 머리를 깎습니다. 머리 깎으러 가는 것을 귀찮아하는 편이라 일부러 조금 짧게 깎아달라 부탁합니다. 관리하는 것조차 귀찮은 마음에 육군 훈련소에 가듯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하고도 싶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인데 머리카락마저 짧으면 참 볼품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와 같이 친구와 만나기 위해 몸단장을 하다 보니 머리카락 정리가 잘 안 됩니다. 머리를 깎아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공중보건의로 지내고 있는 거제도에서 머리를 깎을까 고민을 하다가 충격적으로 머리를 망했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다른 미용실들은 괜찮겠지만 굳이 모험하고 싶진 않습니다. 부산 집에 가는 날을 골라 고향 집에서 가장 가까운 미용실을 인터넷으로 예약합니다. 예약을 하고나니 왠지 귀찮은 일이라도 하나 처리한 기분이 들어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을 나갑니다.

어느덧 머리를 깎는 날이 되어 미용실 의자에 얌전히 앉았습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난 뒤, 가만히 앉아서 위이잉 머리를 깎습니다. 문득 생각이 들어 디자이너님께 말을 건넵니다. “보건소에서 일하는 치과의사는 미용실 디자이너랑 가장 비슷한 듯해요.” 수다스러우신 디자이너님께서 호호 웃으시며 그건 또 무슨 말씀이냐고 되묻습니다. 수다쟁이 둘이서 즐겁게 얘기를 나눕니다.

아마 유일한 차이점이라 하면 미용실에 앉으면 다양한 서비스에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치과에 가면 마음이 두려워진다는 점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 보건소에서는 침습 치료를 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들 일이 없습니다(간혹 스케일링을 두려워하시긴 합니다). 대부분의 동네 주민들께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보건소 구강보건센터로 오셔서 신나게 수다를 떠시는 것 보면 왠지 어릴 때 미용실에 모여 수다를 떨던 어머님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민원인들을 치과 의자에 앉히고 에이프런을 둘러드린 뒤 의자를 눕힙니다. “어머님, 어디가 불편하신 곳 있으신가요?”라고 질문을 드리는 순간, 어머님께서 걸어온 70년간 인생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지금 틀니가 영 파이1)라서 재작년에 부분 틀니를 하려고 했지만, 자식에게 부담주기 싫어서 못하겠다는 이야기부터 이 이빨은 15년 전쯤에 빠졌는데 아참! 그때 우리 집 누렁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둥 주제가 치과일 뿐이지 전혀 치아와 관련 없는 얘기들을 늘어놓으십니다. 

어머님, 솔직히 심심하셔서 구강보건센터에 오셨죠? 라고 물어보고도 싶지만 저도 얘기를 듣다 보면 재미있어서 같이 맞장구를 치며 제 얘기도 늘어놓습니다. 그러면서 간단한 불소나 스케일링이 시작되면 이제 저의 일방적인 대화가 시작됩니다. 아마 얘기를 하시려고 오셨다가 더욱 수다쟁이인 치과의사를 만나 입은 봉인 당한 채로 제 얘기만 들으시다 보면 아차 이게 아니다 싶은 데라고 느꼈을 겁니다. 

다행히 미용실에서는 제 입을 봉하는 일이 없기에 디자이너님과 재밌는 얘기를 잔뜩 나누다가 왔습니다. 머리도 당연히 예쁘게 깎았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치아를 보게 되고 의자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치과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 신입 치과의사인 저도 이제 이 직업에 빠지고 있나 봅니다.

1) ‘별로’라는 뜻의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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