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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 치과용어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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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 치과용어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 이수형 원장
  • 승인 2020.10.08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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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NASA가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을 위한 노력으로 행성, 은하, 성운에 비공식적으로 붙이는 별칭 일부를 앞으로 쓰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먼저 '에스키모 성운'(NGC 2392)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에스키모’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누이트 족’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다. 예전의 ‘인디언’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게 된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미국에서는 최근 에스키모가 들어간 브랜드명, 고유명사 등이 비슷한 이유로 다 변경되고 있는 추세다.

또 처녀자리에 있는 NGC 4567·NGC 4568을 지칭할 때 쓰던 ‘샴 쌍둥이 은하’라는 표현도 쓰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샴 쌍둥이는 19세기 태국에서 태어나, 서커스단에서 일한 결합쌍둥이 형제를 뜻하는 시대에 맞지 않는(antiquated) 표현이라고 한다. 과거 태국의 국명이 ‘시암 Siam’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국 여행을 하면 리조트 이름에 그렇게도 시암이 붙어 있었나보다. 한국의 조선, 백제, 신라 느낌이었구나 싶다.

정치적인 올바름(PC)이 사회전반으로 확대됨에 따라, 기존에 쓰이던 용어가 전격적으로 재점검되고 있다. 워낙 빠르고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문화계에서 시작된 흐름이, 이과계까지 확대되는 양상이다. IT 분야에서는 마스터-슬레이브 용어로도 한참 시끄러웠다.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서 한 장치가 다른 장치를 제어할 때 쓰는 용어지만 요즘 시대에 노예 slave를 입에 담다니! 경을 칠 노릇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할 수도 있지만 미국 의료계에서는 이미 수십년에 걸쳐 의학용어의 PC논쟁이 있어왔다. 적어도 80년대에 ‘은유로서의 질병’의 저자인 수전 손택이 질병에 부가적으로 부여되는 사회적 지위, 낙인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이래로, 환자가 체감하는 질병의 의미는 의학적 팩트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최근에는 그러한 질병의 사회적 메타포 중에 PC에 집중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 중 2010년에 정리된 글을 바탕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CMAJ. 2010 Aug 10; 182(11): 1161–1162). 예를 들어, 비만을 뜻하는 Obesity라는 단어가 의학적인 의미를 넘어서 환자를 뚱뚱하다고 부정적인 낙인을 찍어버리는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 있었다. 중독 addict와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러한 단어를 완곡한 단어들로 대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 환자를 너무 여린 존재, 나약한 존재로 상정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또한 의미가 직관적이지 않고 불분명하거나 어려워지는 문제도 있다. 나아가 바꾼 단어가 자리잡게 되면 그 단어는 또다시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단어를 찾아 교체해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치과는 그 특성상 목공이나 기계 공학 등 다른 분야에서 쓰는 단어를 차용한 경우가 제법 많다. 대부분의 치과용어는 거리낄 게 없지만 몇몇 케이스들을 떠올려보면 마냥 안전하지도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오버덴처를 할 때 사용하는 locator의 일부 회사는 암나사, 수나사를 지칭하는 의미로, male, femal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잡아주는 ‘힘’에 따라 색으로 구분되는데, black male이 processing용인 것이 천만다행일 따름이다.

아니, 그 정도 상황 인식으론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흑인인권운동BLM이 거센 가운데, black이란 단어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다. Blacklist란 단어도 blocklist로 대체되는 추세다. 기구들의 Color code는 다양한 색이 섞여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흔히 쓰는 ‘black triangle’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뭔가 안 좋은, 열등한, 병적인 상태에 black을 지칭하다니! 얼른 ‘Empty triangle’로 바꾸거나, gingival embrasure라고 해야 한다!

환자에게 과도한 절망을 주거나 누군가의 책임으로 느껴질 수 있는 단어들을 완곡한 표현으로 바꾸는 일은 이러한 용어 논쟁을 적정선에서 타협하게끔 만들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방식일 것이다. 이는 의료진이 ‘heart failure’보다 ‘cardiac impairment’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이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치과계에서는 대표적으로 ‘implant failure’나 ‘file fracture’가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미 개원가에서는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피할 수 없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 보다 중립적이고 원만한 용어로 대체해서 사용해왔다.

다만 의료계와 달리 치과계에서는 이런 이슈를 다뤄줄 분과 내지는 기초학과가 애매하다. 이슈의 사이즈나 중요도도 사실 애매하거니와, 정신과나 의료사회학처럼 여기에 관련된 치과 쪽 전문분야와 전문가가 있는지, 설령 있어도 여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개원가 현실에서 쓰는 다양한 완곡어법들에 대해서 좀 더 학문적 논의와 체계적인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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