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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종 교수의 칼럼] 우연의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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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종 교수의 칼럼] 우연의 행운
  • 이승종 교수
  • 승인 2019.06.0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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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치과대학 보존학교실 이승종 명예교수

얼마 전 박근영 감독의 ‘우연 아닌 인연은 없다’라는 글을 읽고 많은 공감을 얻었다. 감독으로서 영화를 촬영할 때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만날 때가 얼마나 많겠는가. 어느 날 노을이 질 때 촬영하다 생각보다 해가 빨리 떨어져서 난감했는데, 갑자기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나뭇잎 그림자가 인물에 흐드러지고 아른거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그때 그 장소에서 그 빛을 만난 게 얼마나 기적 같았는지 모른다고 한다.

또 언젠가는 강원도의 한 목장에 촬영을 갔는데 날씨가 참 변덕스러워 햇볕이 강하게 쏟아지다가 비가 내리길 몇 번 거듭하더니 눈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4월에 눈이라니….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에 젖어가며 촬영을 이어갔는데, 갑자기 방목지의 풍경 위로 눈구름이 몰려와 쏟아지기 시작하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덕분에 인공적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장면이 녹화됐고, 예상치 못한 날씨에 우연히 찍힌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이 됐다.

그래서 박 감독은 우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순간,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냥 지나쳐 보내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했다. 

살아 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우연히 얻어진 영화의 명장면처럼 좋은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나한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0년을 매달 끈질기게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처음에는 같은 반이라서, 집이 가까워서 가까이 했던 친구들이지만 다달이 만나다 보니 공유하는 추억도 많아지고,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들도 나누다 보니 어느샌가 가족보다도 가까워졌다.

요즘은 매주 만나서 등산을 하고 당구도 같이 친다.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즐거운 친구들이다. 주위에서는 그런 친구들을 가진 나를 몹시 부러워하기도 한다. 가끔 옛날로 돌아가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면 바로 지난번에 한 얘기를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즐거워한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전생의 인연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대학 때부터 치과계와 인연을 맺었으니 일생을 통해 거의 평생을 치과의사로 살아온 셈이다. 그동안 치료를 받기 위해 나를 찾아온 사람들만도 수만 명은 되리라.

그러나 환자로서 만난 이들과 개인적인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찌보면 필요에 의해 찾아온 사람들이고, 필요가 해결됐으면 떠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 분들도 내가 그 이상의 인간적인 인연을 이어가기를 바란다고는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분과 이야기가 이어져 그 사람의 살아온 과정을 듣는 경우가 있다. 잘 치료해줘 고맙다고 밥 한끼 함께 하는 경우나 작은 선물을 통해 가까워지는 경우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거나 놀라운 경험을 했던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자주 있다.

꼭 환자뿐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그렇다. 요즘은 대학을 졸업했거나 사회생활을 하다 치과대학을 들어오는 학생들이 꽤 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내가 가르치는 학생으로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인생의 깊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학교 일을 하다 보면 분야별로 위원회 활동을 통해 개개 교수들의 성품을 더 자세히 알게 되는데, 나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인생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함께 생활하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든다. 특히 이러한 좋은 사람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치과의사는 업무 면에서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유익한 직업이다. 환자 하나하나가 소설과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단 한 사람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학교에 있을 때 만난 매우 유쾌한 노인이 있었다. 정기체크를 거의 빼놓지 않고 오셨던 분인데, 만나기만 하면 늘 ‘이 늙은이가 선생님 덕분에 잘 먹고 살고 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신다. 보기만해도 유쾌하고 사람을 즐겁게 만드시는 분이다.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계실까 가끔씩 생각이 나곤 한다.

또 오랫동안 가족 전체를 치료했던 경우에는 그 자녀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부모가 왔을 때 자녀의 안부를 물으면 오래된 동네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신다.

오늘 나를 찾아 먼 길을 오는 환자, 곁에서 나를 도와주는 직원들, 근무가 끝나면 맥주 한 잔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 모두가 우연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하나하나가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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