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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교수의 세상사는 이야기] 라떼 이야기-가을 꽂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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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교수의 세상사는 이야기] 라떼 이야기-가을 꽂의 약속
  • 김진 교수
  • 승인 2021.09.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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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김진 교수

나는 1963년도 출생한 우리 나이 58세의 80년대 대학생이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 나의 과거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중년의 꼰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코로나로 만나지 못하던 고등학교 친구들과 단체 톡방에서 남자들의 수다가 있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교복 세대로 두발 규제가 심했던 그리고 교련이란 특별한 교육을 받을 때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남학생의 앞머리 길이를 5cm 혹은 7cm로 선도반이라는 곳에서 학교 출입문부터 엄격한 검사를 하고 등교했습니다. 톡방에서는 그 당시 몰래 머리를 어떻게 조금 더 기르고 다녔다는 기억나지도 않는 이야기부터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을 고등학교 여러 선생님들의 이야기까지 중년의 수다는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런데 나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하면서 지금의 세대에 대해 아쉬움과 부러움의 이야기로 기나긴 수다가 끝을 맺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엔 작은 것보다 큰 것에 먼저 눈이 가고, 나이가 들면서는 큰 것보다 작은 것에 더 먼저 마음이 갑니다. 어린 시절엔 꽃이 활짝 펴야 봄이 온 줄 알았지만, 나이가 드니 꽃망울만 봐도 봄날인가 싶습니다.

젊은 시절엔 꽃구경보다 사람 구경이 재미있었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 사람 구경보다 꽃구경이 더 편하게 느껴집니다. 젊은 시절에는 밤벚꽃나무 아래에서 친구와 맥주 한 잔 마시는 일에 신바람 났지만, 나이가 드니 벚꽃나무 사이로 보이는 둥근달이 한결 더 반갑습니다. 어릴 땐 봄날이 오자마자 여름을 기다렸지만, 지금은 봄날엔 봄날만 생각하고 가을엔 더 깊어가는 가을을 봅니다. 

하루라도 빨리 봄날이 가고 바다로 달려갈 여름을 상상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이제는 저물어 가는 가을 하루도 자꾸만 아쉬워집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날이 오고 또 오고, 가고 또 갔습니다. 

자연은 변한 것이 없는데, 사람만 변해 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매번 약속한 날을 때맞춰 전해주지만, 사람은 그때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날을 맞이하곤 합니다.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조금 남은 저녁 햇살 아래 수줍은 꽃망울이 눈에 들어옵니다. 새삼 마음이 울컥합니다. 희뿌연 미세먼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사이 아침과 낮 사이의 큰 온도 차이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어김없이 약속을 지켜준 그 작은 꽃 봉우리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가을이 와도 서로 꽃을 먼저 피우려 다투지 않는 코스모스를 봅니다.

먼저 꽃 피운 가을 이름 없는 꽃은 꽃 그대로 아름답고, 뒤늦게 꽃 피운 들국화 꽃은 또 그 나름대로 멋집니다. 쫓기지 않고, 긴장하지 않고 소리 없이 약속을 지킨 그 묵묵함이 저를 또 부끄럽게 합니다. 꽃은 결코 경쟁으로 피울 수 없습니다. 서로의 약속을 지킨 결과로 피어날 뿐입니다. 꽃은 그래서 황홀한 약속입니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약속을 지켰는데 우리는 어떤 꽃으로 그 약속을 지키고 있을까요? 

강요나 설득으로 맺어진 약속이 아닌 한없는 사랑에 저절로 응답한 시간의 약속... 수많은 고통의 미세먼지가 날아와도, 희망과 절망의 큰 일교차에도 굴하지 않고 처연한 가을 꽃망울로 시간 앞에 거듭날 거란 그 약속... 그 황홀한 약한 약속을 실천하는 9월이 되길 기도해봅니다. 코로나로 지쳐가는 세월 속에서도 가을 꽃은 또 이렇게 피어납니다.

 오늘도 진료실에는 나보다 연장자이신 연로하신 어르신이 나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하시면서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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