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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에서 치과기공사로 산다는 것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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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에서 치과기공사로 산다는 것 ①
  • 홍소미 원장
  • 승인 2020.11.05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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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역시 공개하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치과기공사의 처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치과의사라는 직업군에게 불이익이 되지 않을까? 치과기공사들이 이 글을 어떻게 생각할지 가늠할 수도 없을 뿐더러, 굳이 나의 생각을 세상에 공개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만 치과의사 중 아무도 현재 한국 치과기공사의 고단함을 말하는 치과의사가 아무도 없다면 그것이 더 두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원가 절감의 대상이 되고만 현재 한국의 치과기공사는 본질적으로 치과의사의 직업적인 동지이다. 우리는 지금처럼 어려울 때일수록 진심으로 상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으며 남 일 보듯 쓰러지는대로 놓아두지 말고 해결 방법을 함께 찾았으면 한다. 이 글 역시 서로의 입장이 다르더라도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서론
스위스에는 어마어마한 기공료를 받는 기공사가 살고 있다. 그는 그의 빌라로 환자를 초대해서 환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환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도 하는 동안 그 환자에게 가장 어울릴 보철물에 대한 영감을 받고 보철물 제작에 들어간다. 결국 매우 아름답지만 개성이 다른 보철물을 2개 만든다. 환자는 그 보철물들을 옷 입어보듯 try-in 한 후 더 어울리는 보철을 선택한다.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15년 전 한국에 강의 왔던 Willi Geller라는 기공사의 삶의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치 예술가가 캔버스에 현대미술을 하듯 원색의 물감으로 치아 스케치를 하는 쇼도 보여줬다. 기공사들이 원하는 모든 것-예술적인 작업, 멋진 삶-이 함축된 그 강의를 보면서 기공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스타일이 있는 유복한 기공사의 삶을 꿈꾸지 않았을까? 그 때 당시 기공사들은 기공사라는 직업을 통해 고수익도 올리고 대가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15년,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본론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치과기공사들의 삶은 어떠한가? 현재 치과 기공소를 운영하는 기공소장의 말을 들어보자<아래 편지글 참고>. 15년 전 치과기공사들의 꿈은 얼마나 현실과 가까워졌을까? 능력이 쌓이면 대가로서 인정을 받고 예술적인 가치를 높은 기공료로 보상 받고 있는가? 치과기공사라는 직업이 가족을 부양하고 스스로의 직업에 긍지를 가질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인 수준을 보장하고 있는가?

이 글을 쓴 소장은 청년 시절부터 심미보철에 대한 꿈을 꾸었고, 수준 높은 기공물을 만들기 위해 늘 노력했으며 10년간 기공소를 성실하게 운영했다. 그렇다면,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이 꿈을 위해 노력한 자들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만약 절대 다수가 그렇지 않다면,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극복 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치과기공사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먼저 기공사와 기공소장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현재의 기공소장은 기공일을 하는 의료기사이기도 하면서 직원(치과기공사)를 고용하는 고용주의 신분이다. 즉, 같은 치과기공사 면허를 갖고 있어도 고용된 치과기공사와 고용주인 기공소장의 입장이 다르다. 현 시대의 치과기공사라는 직업의 어려움은 대부분 기공소장의 몫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요즈음 기공계의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중견 소장들이 갓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던 2000년대 초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대신 4대 보험도 없이 급여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최소한의 급여만 주던 시절이었다. 심하면 무자격자 기공소장 밑에서 일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때였다. 근로 조건이나 적정 급여에 관한 소장들의 개념이 별로 없었으므로 추가 급여 없이 거의 매일 이어지는 야근은 당연한 것이었다.

2008년도의 자료를 보면 1,2년차 기공사의 월 급여가 100만원을 넘지 않았다. 그처럼 말이 안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있게 했던 것은 꿈이었다. 힘 들 때마다, 소장이 돈 싸 들고 퇴근 하는 것을 보며 기술 잘 배워서 오픈 하면 나도 저 소장처럼 부유해질 수 있겠지, 심미 보철의 대가가 되어서 한국의 Willi Geller가 될 미래를 꿈꾸며 오늘의 박봉과 무급 야근을 참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결국 2008년 오픈했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것이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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