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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연 원장의 생각] 어줍잖은 時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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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연 원장의 생각] 어줍잖은 時論
  • 이효연 원장
  • 승인 2019.08.0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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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치과 이효연 교정원장

시는 낭만이고 둥그러움이다. 한 발 더 가면 낭만과 둥그러움을 가지고 노는 놀이이기도 하다.
세상을 표현하는 방식은 몇 가지가 있다. 하늘의 별을 예로 들어 보겠다.

‘별은 밝기와 크기 그리고 그 반짝임이 아기의 눈과 비슷하기 때문에 별을 보면 아기의 눈을 연상하게 된다’. 논문은 이렇게 쓴다.

‘아기의 눈을 바라보면 별과 같아 보입니다’. 이것은 서술이다. 만약 ‘별과 같이 빛나는 아기의 눈’과 같이 쓰면 서술의 방법에 직유의 멋을 더한 것이 되고, ‘별은 아기의 눈이다’와 같이 쓰면 은유가 된다. 왠지 별이 꿈을 꾸고 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은유는 세상에 대한 서술을 時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와 같은 표현 방식만을 보고 시를 은유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시적 은유에는 본질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본질을 봄으로써 세상과 세상, 사물과 사물을 연결 지을 수 있고, 그 연결을 통해서 비로소 은유적 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것인 줄만 알던 것을 다른 것과 연결 지을 수 있게 되면 그곳에서 자유와 여유가 생긴다. ‘위기는 기회다’, ‘시련은 축복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등등…. 위기, 시련, 고생 등이 우울한 색이라면 기회, 축복, 낙은 밝은 색이다. 우울한 색과 밝은 색이 글 하나로 연결되니 뭔가 툭 터지는 듯하다.

본질을 보면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고, 그 길에서 또한 자유와 여유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본질은 은유를 통해서 연결되고, 그러한 연결은 자유와 여유를 향해 열린 문이 되는 것이다. 이제 그 문을 열고 통로를 지나 넓은 공간으로 나가서 여유롭게 자유를 즐기면 그것을 낭만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가 낭만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뜻이고 이것 역시 은유적 표현이다. 

그런데 시를 은유적 표현만으로 설명하면 아직 좀 모자라는 듯하다. 위에 예로 들었던 ‘위기는 기회다’, ‘시련은 축복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등의 글을 시라고 하기엔 좀 아쉽다는 말이다. 간혹 선전시 또는 선동시라는 정의도 있는데 왠지 구호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라는 말을 들으면 들끓어 어지러운 마음이 편안해지고 담담해질 것 같은 느낌을 갖는데, 선전 선동의 구호를 들으면 오히려 담담하던 마음도 들끓게 만든다. 그건 시의 영역이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구호를 시적 은유로 바꿀 수 있을까? 역시 그 때에도 본질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위기의 본질을 막다른 골목에서 느끼는 절망으로 파악하고, 기회의 본질을 새로운 시작으로 생각한다면 ‘위기는 기회다’와 같은 구호를 ‘막다른 골목은 시작의 첫걸음이다’ 또는 ‘절망의 눈동자는 희망의 빛이다’와 같이 바꿔 보면 어떨까? 같은 내용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해도 하나는 구호 같지만, 다른 하나는 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읽다 보면 들끓던 마음이 담담하고 편안해지고, 그래서 한 숨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시의 둥그러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둥그러운 마음으로 자유와 여유를 즐기는 낭만은 아마도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 되고, 이러한 즐거움을 얻는 것을 놀이라 하면 적절한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시는 낭만이고 둥그러움이고 놀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마음이 바쁘고 들떠서 어쩌지를 못하면 가만히 앉아 시집을 한 권 손에 들어보자. 시를 읽으며 시를 지은 사람의 마음속을 놀러 다니다 보면 어느새 즐거워질 것이다. 시가 어떤 의미가 있다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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