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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 모비딕과 나침반 - 못 먹어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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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 모비딕과 나침반 - 못 먹어도 고!
  • 이수형 원장
  • 승인 2018.06.0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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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연세루트치과) 원장
이수형(글로벌치과) 원장

퇴근하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봐서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와이프의 지적에 따라 고전이라도 읽어보자고 마음먹고 ‘백경’ 혹은 ‘모비딕’을 읽기로 했다. 텍스트만 있는 600페이지 페이퍼백 버전은 읽기에 너무 고역일 것 같아, 중간중간 삽화가 잔뜩 들어간 그럴듯한 하드커버의 700 페이지 양장본으로 구했다. 

그 두꺼움과 위용에 읽기도 전에 뿌듯하여 감상하고 있으려니, 그 책이 궁금해진 7살 아들이 무슨 책이냐고 물어본다. 큰 고래 잡으러 가는 이야기라고 설명해주니 최근 입으로 내는 효과음, ‘폭발’, ‘다 죽음’ 놀이에 심취한 그 녀석이 ‘큰 고래 잡으러 가다가 쾅 하고 펑 해서 다 죽는 이야기야?’라고 물어본다. 이봐, 그거 스포야.

흉포함과 영리함, 신출귀몰함 등으로 포경선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햅 선장이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만류를 뿌리치며 광기어린 추격을 펼치다가 마침내 운명처럼 조우하게 되어 처절한 사투 끝에 포경선 피쿼드 호도 침몰하고 모두 죽고 소설의 화자인 이슈마엘만 살아남는다는 줄거리는 사실 책의 극후반부 일부에 해당된다. 

오히려 모비딕 분량의 90%는 고래의 생태나 고래에 대한 역사적, 종교적, 예술적 기록과 의의에 대한 설명, 포경업 묘사와 가공 방법, 선원들의 일상이 차지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피 다큐를 연상케 하는 상세한 해설만큼이나 상징과 암시가 담긴 부분도 많아 읽다 지쳐 잠들기도 수차례. 하도 진도가 안 나가서 참고래의 등에서 뿜는 물줄기가 한 갈래인지 두 갈래인지에 대해 읽을 무렵쯤에는 아들은 벌써 모비딕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다. 

딱히 자극이나 반전이 있는 책도 아니라서 평탄하게 흘러가는 와중에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모비딕을 쫓던 포경선 피쿼드 호가 사납게 폭풍우가 치는 밤을 맞이하는 챕터는 몹시 인상적이었다. 캄캄한 밤에 천둥번개, 거친 파도, 폭풍우, 그리고 바람은 역풍. 모든 것이 적대적인 힘겨운 상황에서 피쿼드 호는 사투를 벌이며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날 밤 그동안 선장을 만류해오던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내적 갈등도 최고조에 달해서, 잠든 선장의 머리맡에서 머스킷총을 만지작거리며 콱 쏴버릴까 고민하다가 끝끝내 그냥 넘어가고 만다. 

이윽고 순풍이 불어 폭풍우를 빠져나와 순조롭게 항해하던 다음날 아침, 선장 에이햅은 배가 반대로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번개가 치면서 그 전기장에 나침반의 N극이 반대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순풍이라 생각했던 건 사실 역풍 그대로였고 배만 정반대 방향으로 돌렸던 것이다. 배는 다시 돌려지고 에이햅은 새 바늘을 가져와 나침반을 새로 만들면서 다시 모비딕을 쫓는다. 

나침반 바늘 하나만 뒤집히면, 즉 모비딕 하나만 포기하면, 역풍이 순풍이 되고 모든 것이 평화로울 수 있는데 기어코 굳이 새 나침반을 만든다. 에이햅은 이런 행동으로 선원들에게 자신의 카리스마와 추진력을 보여주고자 했겠지만, 최소한 스타벅에게 그것은 집착과 깝깝함에 가까웠을게다. 지난밤의 주저함을 후회했을지도. 

살다보면 용기, 추진력이라고 본인은 생각하지만 실상 집착에 더 가까울 때가 있다. 사랑니 루트 팁이 남았을 때 굳이 익스플로러를 펴서 끄적거리며 헤집는다든가. 낯선 길에서 자동차 네비게이션의 친절한 설명엔 귀를 닫고 조수석의 와이프가 머스킷총을 만지작거리는 줄도 모르고 마이웨이를 외치며 운전한다든가. 매출과 지출, 대출 등 온갖 경영 지표는 적대적인데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온 신환의 애매한 아말감을 뜯지 말고 지켜보자고 돌려보낸다든가. 

어디쯤에서 배를 돌려야 할까? 어디까지 밀고 나가야 할까?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는 지나가던 길에 뚝딱 고래를 해치우고 덤으로 공주까지 구해내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일개 범인의 삶이란 그저 고래를 뒤쫓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법이다. 때로는 높은 확률의 실패가 예상되더라도 ‘고!’를 외치는 객기가 아직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에이햅의 집착은 그 원점이 복수심이었다는 점에서 분명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지만 그의 집착의 순수성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모비딕을 쫓으며 돈도 명예도 가족도 다 버렸다. 적당히 잊고 살거나, 술로 도피하지도, 핑계를 대지도, 타협하지도 않는다. 스스로를 불태우며 타오르는 순도 100%짜리 집착이다. 아, 곤조 있는 삶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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