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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 그랭이법과 12각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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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 그랭이법과 12각의 돌
  • 이수형 원장
  • 승인 2017.10.1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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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루트치과 이수형 원장
이수형(글로벌치과) 원장

우리나라 전통 건축은 자연미를 살리는 것이 포인트다. 주변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기본이고, 건축물을 구성하는 자재들 사이에서도 조화를 추구했다. 그 기법 중에 그랭이법이 있다. 집게처럼 생긴 그랭이를 이용해 두 부재가 서로 맞닿는 면을 한쪽의 자연스러운 형태에 맞춰 다른 쪽을 다듬는 기법이다. 자연석 주춧돌의 원형에 맞춰 나무 기둥 밑단을 깎기도 하고, 나무 기둥 본연의 곡선에 맞춰 벽을 쌓기도 한다.


특히 경주 불국사의 석축은 먼저 아래에 커다란 자연석들을 쌓은 다음, 그 울퉁불퉁한 라인을 음각해 긴 장대석을 쌓아 올렸다. 언뜻 교합면 위에 찍은 Putty의 단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 곡선과 직선의 조화,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가 아름답다. 규격화된 돌을 획일적으로 쌓았을 때는 느낄 수 없는 한국적인 미학을 보여준다. 진중권의 저서 ‘미학 오딧세이’에서 일본의 미와 대조하며 소개되기도 했다.

이렇게 그랭이법으로 쌓아 올린 석축의 기능적인 효과로는 내진성이 있다. 힘의 분산과 완충에 있어서 벽돌식으로 쌓는 것보다 유리해 경주의 건축물이 1천 년을 버틴 이유로 꼽힌다. 돌 사이의 틈새가 충격을 완화했을 거라는 분석도 있지만, 다양한 각도로 만나는 계면들이 외력에 대해 전단력을 최소화하는 효과도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층상형, 판상형보다 Interlocking 되어있는 구조가 유리한 건 당연하니까.

안 무너지고 튼튼한 것은 성벽의 중요한 미덕이라, 이후 성벽도 그랭이법을 활용했다. 한양도성의 경우, 세종 때의 쌓은 울퉁불퉁한 성벽을 존중하며 숙종 때 보수공사한 성벽이 그랭이법으로 포개어 올라가 있다. 특히 수원 화성은 훨씬 후대에 지어진 만큼 커다란 돌들을 서로 빈틈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다듬어냈다. 그 자체로 공학적인 조형미가 아름답다. 이쯤 되면 어느 한쪽의 형태를 살리고 거기에 맞춰 따라간다기보다는, 서로에게 맞춰 내어주고 받아가며 빈틈없이 짜 맞춰진 느낌이 강해진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돌을 다듬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견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과거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페루의 쿠스코에 있는 ‘12각의 돌’이 아닐까 싶다. 얼핏 보면 사각형스럽지만, 잘 보면 모서리도 12개, 꺾인 각도 12개다. 주변의 돌들과의 틈새는 종이 한 장 들어가지 못할 정도인데, 가히 집착에 가까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화강암의 사촌쯤 되는 섬록암으로 모스 경도가 7 정도 되는 단단한 돌인데, 대략 7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본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의견이 분분할 만큼 워낙 정밀하게 가공되어있어, 고작 잉카 성벽을 이루는 큰 돌 중 하나일 뿐인데, 쿠스코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우리가 쓰는 재료들처럼, 사람도 경화시간이 있다. Mixing Time의 유년기를 지나 Working Time의 청년기도 지나면, 단단하게 굳어져 어른이 되고 책무를 다하는 시기가 된다. 사고방식이나 주변과의 관계도 점차 가소성을 잃는다. 예전에는 언제고 다시 녹을 수 있는 Agar는 못 되더라도 말랑말랑함을 잃지 않는 알지네이트 정도는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 돌이켜보니 이미 나도 남들처럼 Stone이었구나 싶다. 우리네 석공은 그 단단한 화강암을, 페루의 석공은 섬록암을 다듬어 냈는데, 어느새 굳어버렸다고 모델의 기포나 떼는 수준의 양보도 쉽지 않다. 손에 쥔 것들을, 혹은 나의 아집들을 내려놓기도 내어주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볼록한 돌들끼리 부딪쳐봐야 깨질 뿐이고, 쌓아봐야 쉬이 무너질 뿐이다. 석공은 수백 년을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방법을 돌에 새겨놓았다. 우리가 못 보고 지나칠 뿐이다.

두서없는 글을 마치면서 사족을 덧붙이자면, 사실 화성의 돌이나 페루의 돌이나 모양이나 완성도가 엇비슷하다. 12각이면 어떻고 7각, 8각이면 어떠한가. 페루는 멀지만 수원은 가깝다. 맛집도 많다. 주말 나들이 코스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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